소설 <식구의 탄생>
정민은 더블에스 편의점에서 근무했던 2년 중 처음으로 점장에게 하루만 근무를 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목걸이와 팔찌를 직접 셰프에게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민은 아침에 셰프가 302호에 찾아올 때까지 방 안에서 팔찌를 만들며 버텨볼 생각이었다. 왜 진작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되면 방으로 들어오는 셰프의 얼굴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테다. 정민의 부탁에 점장은 대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말에 생각난 사람은 철훈이었다.
- 배달일 지겨워진 참이었는데, 뭐, 그럽시다!
철훈은 흔쾌히 승낙했다. 철훈은 야심한 밤 더블에스 편의점으로 출근해 정민이 그랬던 것처럼 편의점 조끼를 걸쳤다. 조끼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새로워 피식 웃었다. 카운터에 털썩 앉아 책을 폈다.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글씨를 많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굳어가는 머리가 지연과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핑핑 돌았다. 여전히 데미안의 입에서 나오는 심오한 말들의 의미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불가해한 것들로 지연과 대화를 하는 게 즐거웠다.
글을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대화할 것들이 생겼고, 서로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젯밤에는 주인공 싱클레어가 어렸을 적 왜 엇나갈 수밖에 없었는지, 금욕적이고 보수적인 가정환경은 사춘기의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밤새 토론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둘은 서로의 과거를 얘기하게 되었고, 지연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사춘기라고 할만한 시기를 겪을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한 번도 말대답한 적이 없어요? 뭐, 첫사랑 같은 것도 딱히 없었고?
- 음... 네
- 괜히 양아치처럼 담배도 펴보고 싶고 술도 마셔보고 싶고, 별것도 아닌 일에 화나고 짜증나고 그런게 없었다고요?
- 에이, 짜증도 나고 화도 나죠. 근데 그걸 표출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술담배는 관심도 없었고요. 나 너무 재미없죠?
민망하다는 듯 웃는 지연을 보며 철훈은 중얼거렸다. – 신기한 사람일세 – 지연은 알면 알수록 참 무해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화가 나면 남한테 해코지하는 대신 머리를 찧고 손톱을 물어뜯게 된 건가. 철훈은 홀로 생각했었다.
-짤랑
새벽 손님이 문을 여는 소리였다. 철훈은 아쉽다는 듯 책에서 눈을 뗐다.
- 어서오십쇼
철훈은 손님의 얼굴을 확인했다.
당황해 숨을 들이마셨다. 손님은 다름 아닌 혜미였다.
- 아, 나, 동아리 모임이 이제 끝나서. 오빠, 여기서 일하는구나
- 오늘만. 누구 대타 좀 뛰느라.
어색한 정적. 멀찍이 선 혜미에게서 옅은 알콜향이 났다. 심경의 변화 탓일까. 원래 긴 갈색머리를 고수했던 혜미었지만 그새 귀밑으로 짧게 잘려 있었다. 철훈은 먼저 말문을 텄다.
- 술 마셨어?
- 응
- 얼마나?
- 많이
- 밤늦게 술 마시고 혼자 돌아다니지 마라
철훈의 걱정 어린 말에 혜미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물을 참으려는 듯 코트 자락을 꾹 쥐었다. 혜미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 오빠한테 미련이 하나도 안 보여서 너무 슬펐어
- 그건...
-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한 번에 헤어져? 나한테 답장 없을거 알면서도 문자도 보내보고, 밤에 술 취한 채로 전화도 해보고, 내가 안 나올 거 알고서도 우리집 앞에 찾아와 봐야지!
- ...
- 찾아오기는 개뿔 연락 한번 없었잖아!
철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차인 건 난데 화는 혜미가 났네. 솔직한 심정으로는 철훈도 물론 혜미와 헤어지고 나서 허전하고 마음 아팠다. 하지만 감정 기복도 크고, 아직 아이같은 혜미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일이 어렵고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다. 오히려 철훈은 그때 앞뒤 가리지 않고 결혼을 밀어부친 자신을 바보 같았다고 탓하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날 가두고 있는 배달박스를 부수고 싶어 혜미를 이용한 건 아니었나 반성하고 있었다. 철훈은 다시 솔직해지기로 했다.
- 미안하다, 사실은 내가...
철훈이 입을 떼자 혜미는 돌연 큰 소리로 눈물을 터트렸다. 갑작스런 눈물에 놀란 철훈은 -야, 야 갑자기 왜 울어 - 허둥지둥거리며 혜미를 달래기 위해 부산스럽게 주변을 뒤지며 휴지를 찾았다.
그러다 툭-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진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건 <데미안>이었다.
혜미는 놀란 눈으로 책을 바라봤다.
- 이거 오빠꺼야?
철훈이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혜미는 책을 주워 일어났다. <데미안>. 혜미의 아버지가 철훈에게 결혼을 하고 싶으면 읽어오라고 큰소리쳤던 그 책이었다. 내가 그렇게 읽으라고 할땐 읽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제야... 그래,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혜미는 철훈을 와락 안았다.
- 이거 미련인거지? 그렇지, 오빠?
그런건가? 철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이렇게 책을 읽는게 정말 혜미에 대한 미련 때문이야? 혜미의 아버지 덕에 데미안을 읽게 된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걸 혜미와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였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내 답도 없는 자격지심이 발동한 탓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김지연이란 사람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을지 궁금해졌다든가... 철훈은 혼란스러워 말을 더듬었다. - 어, 그러니까, 그게… -
하지만 그렇게 고민하는 와중 혜미는 철훈의 품에 와락 안겨 다행스럽다는 듯 자꾸만 울었고 철훈은 정신없이 혜미를 달랬다. 혜미가 울음을 그치고 철훈이 정신을 차렸을 때쯤엔 - 흐엉, 고마워 오빠, 우리 이제 진짜 제대로 다시 시작해보자! 오빠 아직 나 인스타 팔로우 안 끊었더라, 나도 오빠랑 같이 여행 가서 찍은 사진 인스타 올린 거 숨김만 해놓고 아직 안 지웠어. 나 머리만 잘랐지 울아빠한테도 아직 헤어졌다는 말 안 했다니까! - 둘은 다시 시작해보기로 결론이 나 버렸다. 기뻐하는 혜미에게 헤어지자는 말로 마음에 대못을 박기가 미안했던 철훈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오직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온통 채우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 지연씨랑 계속 만날 수 있을라나. 매일 보는 걸 그만두고 싶진 않은데.
*
창밖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정민은 이년 전 처음 화락맨션에 입주할 때 주인 아저씨가 물었던 질문들을 떠올렸다.
넌 무얼 잘하니? 없어요, 아무것도.
너는 어떤 것을 좋아하니? 없어요.
그럼 어떤 것에 진심이니? 없어요.
주인아저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무슨 일을 하다 왔니? 금속 공예랑 끈 공예 둘 다요.
사실 그건 주인아저씨가 물어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정민은 방안에 털썩 앉아 자재시장에서 사온 초실의 포장을 주섬주섬 풀었다. 대타를 뛰어 준 철훈 덕에 방안에 앉아 작업을 하면서 셰프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정민의 존재를 셰프가 눈치채지 못한다면 방에 들어오려는 셰프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새 실의 냄새가 정민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끈으로 만드는 악세서리는 기계를 이용해서 정밀하게 한땀 한땀 무늬를 새길 수 있는 금속 악세서리보다 화려함도 덜하고 노력도 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민은 먼저 간단한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고, 그 다음으로는 매듭공예로 정성이 들어간 식탁보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정민은 고개를 숙였다.
합장매듭으로 빨강색과 검정색 실을 촘촘히 땋아가기 시작했다.
빨간 실을 검은 실 위로 돌려 작은 구멍을 만든다.
아래로는 검은 실을 돌려 작은 구멍을 만든다.
구멍에 빨간 실을 꿰어낸다.
그 다음 검정색
그리고 빨강색
다시 검정색
그 위에 빨강색
정민은 나름 이삼십대 여성들에게는 입소문을 탄 주얼리 브랜드의 핸드메이드 공방에서 일했었다. 시그니처 라인 몇 개는 한동안 인스타그램의 인플루언서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스무 번 더 꼬아낸 다음에는 은색 팬던트
팬던트 컬러는 실버, 사방에 박힌 사파이어와 루비 컬러의 스톤, 구형, 지름은 15mm
눅눅하고 단단한 초실
건조한 손끝
지문은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사장님은 그랬다. - 정민씨 정도는 누구나 다 해. 여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손끝이 야물거든, 다 그래, 다-
그리고 검정색
다음 빨강색
실을 당긴다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빨강색
검정
빨강
실을 당긴다
-꼭 이걸로 벌어먹고 살 필요 없잖아-
검정
빨강
-내가 정민씨 아끼는거 알지? 근데 정민씨는 손이 좀 느려.-
검정
빨강
실을 당긴다
-애매하면 서둘러 접는게 상책이야-
그건 정민이 애매한 사람이라는 뜻일 테다. 정민이 아무리 열심히 팬던트와 팔찌를 만들고, 반지를 세공해도, 애매한 정민에게는 허용된 자리,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 정민은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세공과 공예에 더 욕심이 생기고, 더 진심이 될수록 상처도 컸다. 정민은 깨달았다. -문제는 내가 너무 진심이라는 거야- 정민이 결론 낸 것은 진심을 잃자는 것이었다. 그건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덜 상처받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 합리화했다.
검정, 빨강, 검정, 빨강, 검정, 빨강, 정민은 느리게 느리게, 하지만 탄탄하고 꼼꼼하게 초실을 꼬아 댔다. 모든 매듭이 한 치의 차이도 없이 균일한 모양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검은 실은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온 새벽빛을 받아 너울거린다. 실타래는 바닥에서 한참을 굴렀다. 운명의 여신이 누군가의 삶을 실로 꼬아내듯 정민은 언젠가 오로지 자기 힘으로 사랑받는 삶이라는 운명을 직접 땋아내고 싶었다.
정민의 작품은 끝이 났다. 바깥은 동이 트고 있었다.
뱃속에서도 꼬르륵거리며 배꼽시계가 울렸다.
곧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 부스럭
근처에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느껴지는 인기척.
머지않아 천천히 문밖에서 열쇠를 따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 셰프가 분명했다.
정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슬며시 문고리가 돌아갔다. 평소와 달리 문이 열려있었다.
정민은 아차했다. -문을 잠갔어야 했는데!- 문밖의 셰프는 동작을 멈췄다.
- 콰광!
문밖에서 난 소리였다.
정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달려 나갔다.
탁탁탁-
발소리가 메아리쳤다.
정민은 3층 복도를 확인했다. 은은한 연포탕 냄새만이 남아있었을 뿐 이미 셰프는 사라지고 없었다. 공들여 끓였을 연포탕은 쏟아져 바닥에 너저분했다. 마치 셰프가 연포탕으로 변한 것 같았다. 대체 왜 얼굴을 안 보여주려는 거야, 대체 왜. 정민은 속이 탔다.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사라지려면 분명 가까운 곳에 숨어야 할테다. 분명 근처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났었다. 마침 냄비가 쏟아진 방향도 303호 쪽이었다. 국어국문학을 공부한다던 지연이었지만, 분명히 부엌은 물기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분명히 그 음식에는 지연같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순수함과 진심이 담겨 있었고, 정민은 그 사실을 직시하고 싶었다.
정민은 홀린 듯 성큼성큼 걸어가 303호 문을 쿵쿵 두드렸다. 손에는 방금 만든 팔찌와 목걸이를 들고 있었다. 정말 지연이 셰프라면 정민은 당장 그걸 선물할 생각이었다.
- 나와 봐요! 잠깐만 나와보라니까요!
지연이 놀라서 문을 빼꼼 열었다. 정민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짓는 지연을 몰아부쳤다.
-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연씨 같아요. 지연씨죠?
- 네?
-지연씨 맞잖아요. 매일같이 식탁에 상다리 부서지게 밥 차려놓는 사람, 지연씨잖아요
-저, 저 아니에요.
지연은 당황한 듯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정민은 계속 지연을 추궁했다.
- 매일 밤마다 쿵쿵거리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도 그렇고, 손에 상처 많은 것도 그렇고, 그거 다 요리하다가 그런거 아니에요? 먹는 사람 늘어난 거 알고서 음식 양도 늘어났고, 이거 봐요, 지금 이 냄비도 303호 쪽으로 쏟아져 있잖아요.
- 저희집 부엌 깨끗한거 이미 다 보셨잖아요. 저 국문과 대학원생이에요, 집에 전공책 아님 소설책 밖에 없어요
- 정말이에요? 진짜냐고요!
정민은 재차 물으며 지연에게 따졌다. 밖의 소란에 지연의 방에서 나온 철훈이 정민을 막아섰다.
-그만합시다, 네? 지연씨 지금 나랑 방에서 책 읽으려고 했어요. 부엌도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하다고요
그는 퇴근을 하자마자 지연의 집을 찾은 듯 했다. 정민은 혼란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음식들에서 분명 지연씨가 생각났는데, 지연씨여야 하는데, 철훈은 정민에게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 셰프가 누군지를 꼭 찾아야 해요?
- 그럼요!
- 왜요?! 여태까지 뭐 훔쳐간 것도 없고, 나쁜짓 한 것도 아니고. 주인아저씨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지, 그렇다고 경찰 부르기는 싫다고 하지, 괜히 애꿎은 지연씨 데려다가 괴롭히질 않나. 뭐 어쩌자는 겁니까?
- 팔찌를 직접 주고 싶어서 그래요!
- 정민씨한테 얼굴 보여주기 싫다잖아요, 그냥 쪽지 남겨요. 아니면 내가 하루 배달 빠지고 대신 전해줄게요.
- 싫어요
- 왜요?
- 얼굴 보고, 직접 건네줄 거예요
- 대체 왜 꼭 얼굴을 봐야 하는 건데요?
- 그건…
- 대체 왜요?
-…
- 이유가 뭔데요!
- 누군지 알아야 붙잡아 놓든 말든 하죠!
바닥을 적신 연포탕의 뜨끈한 기운에 정민의 눈이 화끈거렸다. 정민은 결국 와락 눈물을 터트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 붙잡아 놓고 싶단 말이에요! 셰프가 나한테 평생 이렇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갑자기 이러다 사라져버리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이에요!
-...
-셰프한테 쪽지도 남겨봤어요, 그만둘 거면 미리 언질이라도 달라고. 근데 답장이 없었어요. 나는 셰프 덕분에 위로도 받았고, 다시 팔찌도 만들기 시작했고, 내 삶을 살게 되었다고요. 이제 이 밥 없으면 나 어떻게 살지. 나는 무슨 힘으로, 무슨 낙으로, 무슨 희망으로 살지. 답이 안 나오니까 너무 무섭다고요! 무서워서 그래요, 알겠어요?
잠깐 말을 잃었던 철훈은 이해가 된다는 듯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하던가!- 시원하게 소리쳤다.
- 뭐, 뭐에요 그게 다에요?
- 무섭다면서요? 더 설명이 필요해요?
오히려 정민에게 되물은 철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털썩 쪼그려 앉아 연포탕을 치우기 시작했다. 철훈의 쿨한 반응에 정민은 눈물이 쏙 들어갔다. 철훈이 이렇게 공감 능력이 좋은 사람이었던가. 정민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손으로 눈물을 쓱쓱 닦았다. 정민은 민망해서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 잠자코 둘을 지켜보던 지연에게 말했다.
- 미안해요, 지연씨. 사실은, 셰프가 지연씨이길 바랐나봐요.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지연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은 철훈의 옆에 쪼그려 앉아 연포탕을 익숙한 동작으로 치웠다. - 편의점 대걸레가 있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 정민은 울음의 여운에 훌쩍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지연은 자신이 죽으려고 했던 그 날을 떠올렸다. 닭곰탕 국물이 살려놓은 위장을 떠올렸다. 죽어가는 뱃속이 활기를 되찾은 그날. 그 셰프라는 사람은 지연을 살렸다. 지연은 셰프가 너무 소중해서 그를 잃고 싶지 않은 정민의 마음을 이해했다. 지연은 방안에서 작은 걸레를 가지고 나왔다.
- 나도 같이 찾고 싶어요, 그 셰프.
의외의 제안에 놀란 정민은 잠시 벙찐 채로 어버버했다. 철훈은 이참에 지연의 얼굴 볼 구실이나 더 만들어야 겠다는 마음으로 - 어휴! 사람이 많아지면 더 빨리 찾겠네! 빨리 좋다고 해요 - 정민을 채근했다. 정민이 얼떨결에 수락하자 철훈은 마치 공증인이라도 된 듯 함께 셰프를 찾게 되면 지연도 함께 셰프의 밥을 먹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 요즘 세상이 어느 땐데, 공짜가 어딨습니까, 안 그래요?
정민은 요즘 들어 많아진 음식의 양을 떠올렸다. 지연도 겉으로는 음침한 구석이 있어도 내면은 꾸밈없고 진실한 사람 같았다. 정민은 - 그래요, 밥도 같이 먹읍시다 - 고개를 끄덕였다.
철훈은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식구가 하나 늘었군요
철훈과 지연이 연포탕의 건더기를 주워 봉투에 담으면 정민은 대걸레질을 했다. 철훈은 다리 하나 잃지 않고 온전한 낙지들을 쓰레기 봉투에 담으며 자꾸만 입맛을 다셨다. - 하이고, 아까브라. - 정민도 마음이 아팠다. 쓰레기 봉투에 담긴 연포탕의 잔재에서 억울하게 쓰레기가 되어버린 그날의 김치찌개가 떠올랐다. 어느새 연포탕은 깔끔히 묶인 종량제 봉투 하나가 되어 있었다. 철훈은 오늘의 일과를 끝마쳤다는 듯 말했다.
- 오늘은 새 식구가 생겼으니까! 연포탕은 바닥에 양보한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