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식구의 탄생> 마지막화
- 언제든 다시 오렴. 겨울이 온 것 같다면
주현은 방을 빼겠다는 말을 전하는 성희와 정민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현이 화락맨션의 집주인이 된 지는 언 10년째였고 성희와 정민은 제 발로 나간 첫 번째 세입자들이었다. 지연과 철훈의 교제 소식도 참 다행스러웠다. 철훈은 흑백화면 속에 사는 듯한 지연을 웃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지연의 얼굴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던 여유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철훈 덕 같았다.
화락맨션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죽음과 가까워 보이는 젊은이만을 세입자로 선택했던 건 주현 자신이었지만 그들의 운명을 거스르고 싶었다. 삶이 죽음보다 손톱만큼이라도 더 낫다고 설득하고 싶었다. 그날은 지연에게 월세를 받지 않기로 합의한 날이었다. 여느 때의 입동역 날씨처럼 날은 추웠고, 지연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푸석하고 어두웠다. 요 며칠 낌새가 불안해 보이는 지연을 찾아가 주현은 말했다.
- 지연아, 월세는 이제 내지 말고, 대신 아저씨한테 논문 쓴 거, 그거나 나중에 보여주련
연신 괜찮다며 고개를 젓는 지연에게 밥을 사 먹으라고 오만원을 넣은 봉투 하나를 건넸다. 결국 봉투를 넘겨받은 지연은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피가 나도록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주현은 그 난도질당한 손톱에 자꾸만 마음이 쓰렸다. 그래도 몇 달은 괜찮겠지, 주현은 속으로 조금은 안심하며 303호를 떠났다.
하지만 그날 주현은 오랜만에 시체를 마주해야 했다.
201호 종한의 주검이었다. 엊저녁 마당에서 종한을 마주쳤을 때에도 평소의 표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요 몇 달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건만 꽃다운 스물일곱 종한이 죽었다. 종한은 주현의 딸보다 딱 일년 더 살았다. - 내 딸처럼 너희도 왜 예고없이 떠나려고 하는 거냐 - 주현은 소리 없이 울었다.
주현은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구급대원을 불렀다. 허리춤에 찬 열쇠뭉치에서 종한의 방키를 빼 문을 열었다. 쾨쾨하고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구석에는 입에 거품을 문 젊은 남자하나가 널부러져 있었다. 구급대원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종한의 시신을 수습했다. 구급대원의 어깨 너머로 눈감은 종한의 얼굴이 보였다. 죽은 사람의 얼굴에는 차분한 수평만 가득하다.
감긴 눈, 그 위의 눈썹, 늘어진 입술.
주현은 맨션 마당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착잡한 마음에 연기를 크게 내뱉고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그때,
하늘 사이를 뚫고 두 개의 신발 밑창이 내려오는 것이다.
주현은 눈을 비비고 다시 고개를 젖혔다. 분명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옥상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두 다리였다. 사람들은 죽는 방법도 다양했다. 다리의 주인은 높은 데서 떨어져 죽으려는 것 같았다.
주현은 담배를 비벼끄고 정신없이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다리의 주인은 301호 성희였다.
성희는 지연이 앉았던 그 옥상 난간에 앉아 당장 뛰어내릴 용기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정인하를 참 좋아했고, 그건 성희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 좋은 눈빛과 표정에 속아 넘어가 그의 밑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쏟아붓는 폭언, 평일과 주말 구분 없이 호출되는 살인적인 업무강도는 도저히 버틸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슬로우 푸드를 강조하던 방송에서의 모습과 달리 미리 만들어진 제품이나 치킨 스톡, 비프 스톡 등 각종 스톡류를 음식에 분별없이 사용했다. 스톡을 넣으면 음식에 빠르게 맛이 돌았고, 완제품을 사용하면 시간이 절약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빠르기만 한 건 한식이 아니었다. 모든 조리 과정이 요행없이 이루어져야 했고 정직해야 했다.
그래서 필요했던 것은 바로 매니저 자리였다. 성희는 매니저가 되어 쌓여있던 완제품들을 당장 처분하고서 분점의 메뉴 개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을 할 계획이었다. 정셰프는 오년을 참으면 간단한 평가를 거쳐 신규 분점의 매니저 자리를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말에 성희는 주말 새벽까지 일을 하면서도, 마구 내뱉는 폭언을 받아내면서도 나는 내면이 없는 사람이라 최면을 걸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지쳤다.
지쳐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희망 고문을 사 년째 참아내던 어느 날. 그날도 성희는 정 셰프가 그렇게 강조하던 ‘정신력’으로 주방의 고된 일을 해치우고 있었다. 하지만 살인적인 스케줄에 졸음은 쏟아졌고 눈꺼풀 주변은 연신 파르르 떨렸다. 칼을 쥔 손에는 서서히 힘이 빠졌다. 억지로 눈에 힘을 주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세 시간의 쪽잠으로 모든 피로를 소화하지 못한 몸이었다. - 정신력? 개나 주라지 - 성희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도미살을 손질했다. 주말이라 손님이 많아 한참 밀린 주문에 마음이 급했다. 그러다 손등에 날이 선 칼을 대 버린 것이다.
정셰프는 그런 성희에게 산재 처리는 해주지 못할 망정 해고를 통지했다.
난 정 셰프의 못난 표면을 윤기 내기 위해 사용된 소모품이다. 난 왜 그런 사람 밑에서 꾹꾹 인내하며 4년의 시간을 보냈나. 짤린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성희가 다시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도록 압박했다. 성희는 거절했다. 로스쿨에 들어갈 능력도, 의지도 없으니 아버지도 그 사실을 제발 받아들이라 애원했다.
- 일자리 하나 못 구할망정 식당에서 짤리기나 하고, 이 멍청한 것! 서른이 되도록 이룬 게 하나 없다! 쪽팔리지도 않은 거냐! 응?
그는 성희의 잘난 동창들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에 비해 성희가 얼마나 별볼일 없고 볼품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그래서 아버지의 삶마저 얼마나 볼품없게 만들고 있는지를 상기시켰다. 성희는 억울했다. 그간 미친 듯 음식에 전념했던 시간이 왜 한순간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전락해버린 걸까. 하지만 요리를 포기하자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사는 게 고통스러웠다. 스스로가 불쌍했지만 또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 끝내 답이 나오지 않자 성희는 홧김에 옥상까지 올라오게 된 것이었다. 주현은 성희를 달래듯 물었다.
- 성희야, 어떻게 하면 거기서 내려올래? 응? 뭐가 널 가장 힘들게 하니?
멍한 표정으로 성희는 손등에 날이 선 칼이 들어왔던 감각을 떠올렸다.
성희는 잘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을 보며 대답했다.
- 제가 다시 칼을 잡을 수 있을까요. 제 요리는 누가 먹어줄까요.
그 무기력하고 체념 어린 대답을 듣자 주현의 머릿속에 종한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희의 무기력한 얼굴에 눈을 감은 종한의 얼굴이 겹쳐졌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더 이상은.
주현은 허리춤의 열쇠 뭉치를 한참 어루만졌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옥상 구석의 거미줄을 한동안 응시했다. 거미는 거미줄(蛛絃)을 내뿜으며 집을 짓고 있었다. 방사형으로 뻗은 다섯 개의 줄. 거미는 서로 절대 만나지 않을 것 같았던 다섯 개의 줄을 이어 오각형을 만들었다.
너희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다.
주현은 성희에게 다가가 말했다.
- 좋은 사람이 있다
성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현과 눈을 맞췄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다는, 빤히 보이던 거짓말을 했던 그 친구. 너희 둘의 눈이 참 닮았다. 화락맨션에 온 뒤로 식욕을 잃고 말라만 가는 그 친구를 다시 살려주렴. 주현은 허리춤에 걸려있는 열쇠 뭉텅이에서 열쇠 하나를 성희에게 건넸다. 열쇠를 받아 든 성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주현을 쳐다봤다. 낡은 열쇠에 붙은 작은 포스트잇에 글자가 적혀있었다. - 302호, 이정민 -
어느새 동지가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