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기러기 아빠들을 위한 옹졸한 변명. 1-시작

by Toronto Jay


2014년 9월. 참으로 평온했던 그날 오후의 단상
*하물며 날씨까지 좋았다*



"여보 할 말이 있어."


대부분의 아빠들이 이 말 한마디에 주눅이 든다.

순간 번개처럼 내 머릿속 전두엽과 후두엽이라고 불리는. 생김새는 남들과 비슷할 테지만 객관적으로 기능을 뜯어 분석해 보거나 그동안 살아온 결과를 놓고 봤을 때는 보통 사람보다 한참 모자라는 아둔한 기능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한 그리 똑똑하지 않은 나의 뇌는 -충격을 받아도 그 쓰임새가 크게 변할 것도 없겠지만 느낌상-전깃줄에 감전된 참새가 된다.


당황하지 말자. 침착하자. 그리고 떨지 말자.

하지만 그게 그리 되지 않더란 말이다.

마치, 시작은 호기로웠지만 결국엔 잘못 들어서고만. 그 무섭다는 미국 할렘가 뒷골목의 영화 속 불안한 예감처럼. 어마 무시한 덩치의 감당 불가의 불한당을 마주해 버린 듯한 난감함과 당황스러움이. 숨기려 하면 할 수 록 입가에서 시작하여 살 가득한 나의 볼때기를 거쳐 결국은 불안한 눈동자의 떨림으로 이어진다.


아뿔싸! 읽힌 것 같다. 침착하자. 그래야만 한다.

다 들킨 건 아닐지도 모른다. 일단 파악해야 한다. 어디까지 인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전까지는 절대적인 방어가 필요하다. 살아야 한다.

어릴 적 그리 재미나던 스카이 콩콩의 리듬감이 발아래가 아닌 나의 심장에서 느껴지기 시작한다.

-젠장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이 상황에서 꼭 이렇게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

무엇을 들켰을까? 무엇을 잊었는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 남자들. 그것도 아이를 키우며 나름 평범하게 살아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남편"이라고 불리는 이 특이한 힘없고 나약한 존재는 이럴 때 보통 이 세 가지로 빠르게 생존을 위한 답변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무엇을 들켰을까? 무엇을 잊었는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어렵게 정의를 내린다면 이러하다.

1. 숨기고 싶은 사고. 2. 계획이나 약속의 차질. 3. 감당 불가의 해결책 마련


핵폭탄 두어 개를 양손에 들고 웃으며 선전포고 하는 적 앞에 선 훈련소 신병이지만 "깐 보이면 안 된다."


"응 그래 무슨 일이야?"


눈을 마주하면 안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곤한 듯 괜찮은 듯 눈을 애써 비벼보며 답을 했다.


그런데! 그러했는데! 그러했지만! 아. 뿔. 싸!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나온다. 그리고 나는 더욱 혼란에 빠진다. 이런 비장의 "수"가 있었다니...


"아니다. 다음에 얘기할게..."


그리고는 씁쓸한 웃음과 함께 뒤돌아서며 그 속을 알 수 없는 어깨의 들썩임까지 기어이 드러낸다.


피가 마르기 시작한다. 실제로 말랐을 거다 분명히!


더 이상 묻지 못하고 그 아름답던 2014년 9월의 오후는 새끼 개미 한 마리가 옷 속에서 온 맨몸을 휘집고 다녀도 하나도 간지럽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괜찮음", "아무렇지도 않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하늘이. 어둑한 밤하늘로. 슬그머니. 원래의 하늘빛으로 속내를 드러내던 그 시간.


안방에 있던 집사람이 이번엔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은 채 더 무서운 방식으로 나에게 말을 건다.


이번엔 카톡이었다.


"여보 잠깐 얘기 좀 해"


그렇게 나는 발목에 커다란 쇠고랑을 찬 죄인처럼 두발을 무겁게 철컹거리며 안방으로 향해야만 했다.


괜한 말 한마디를 내뱉으며 말이다. "에이~ 귀찮게~ 왜 그러는데?"


그때가 2014년 9월. 어느 날 밤이었다.


이미 결정된 협상의 시작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속 목젖 바로 앞쪽. 정확히 말하면 전방 3.5센티미터 즈음이었다. 잔뜩 무거운 집 공기가, 알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적 화학 공식으로 변화하여, 기존의 질량이 무거워지고 원소 기호마저 바뀐듯한 멜랑꼴리 한 기체가 되어 숨 쉬거나 코 풀 때 이외에는 별로 사용해 본 적 없는 콧구멍을 통해 후두로 그리고 바로 그곳 목젖 바로 앞 3.5센티미터 위쪽 지점에 사막의 황폐한 모래바람처럼 버스 락 거리며 내려앉아 쩍쩍 갈라지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핑계였다. 스스로를 속인 아주 멋있어 보이는 핑계였다. 사실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내 몸은 실제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커피 마실 거지?" 세상 다정스러운 말투였지만 영혼이 살짝 머리 위로 분리되어 몸과 따로 노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꽤나 있어 보이던 캡슐커피 두 잔을 내려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탁자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는 순간 이미 나는 "벌거벗은 남편 놈"이 되어 있었다.

아닌 척하며 담담히 내린 커피는 맑은 시냇물에 두꺼비 한 마리가 살짝 오줌 두세 방울 지린듯한 약간의 불투명한 듯한 느낌을 주는 옅은 갈색의 "뜨거운 물" 뿐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이미 하루 전 두 번이나 내린 커피 캡슐을 바꾸지 않고 그 상태에서 두 번 연속 커피를 내리고 말았다. 그게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거다.


혼잣말로 읊조렸다. "요즘은 연한 게 좋더라."


하. 지. 말. 걸. 그. 말.



묘한 웃음을 짓던 아내가 이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더니 어리바리한 남편과는 "나는 다르다"라는 듯. 초구를 강속구로 정면 승부하며 들어왔다.


"나 경민이랑 캐나다 갈래"


여기에서 "나"는 2003년 직장 생활하며 만난 어떤 분의 딸로, 술 마시다 흥에 겨워 딸을 술자리에 기어이 불러내어 자랑을 하다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자리에 있던 지금의 "벌거벗은 남편 놈"과 결혼해 버려 그분의 사위가 되어버린. 기가 막힌 사연을 가졌던 노인의 딸을 말하는 거고.


다음의 "경민이"는

"벌거벗은 남편 놈"의 아들로 5남매의 장남이자 당신의 아버지 역시 장남이었던 내 아버지의 손자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첫째를 성공적으로 아들을 낳아 장손의 명맥을 이었으나, 안타깝게 그 첫째 아들이 딸만 둘이다 보니 대가 끊길지 모른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사시다, 막내아들인 "내"가 아들을 낳자 동네방네 자랑하며 다니시느라 하루가 모자라셨던 분이다. 바로 그 귀한 우리 집 장손이 바로 이경민이다.


문제는 다음 단어인데. "캐. 나. 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캐나다"라는 나라는 "태평양 건너편에 있고 땅덩어리가 크며 얼굴색 하얀 백인이 많이 살고 있고, 미국과 가까우며 자연환경이 좋아서 애를 키우는 엄마들이 가장 이민 가고 싶어 하는 나라 중 하나다" 이 정도였다. 특히 북미에 있다는 건 미국의 북쪽에 있다는 얘긴데 아내에게 이 얘기를 듣는 순간 갑자기 서울에 사는 아이들에게 강북과 강남이 한강을 기준으로 한강 북쪽이 "강북"이며 남쪽이 "강남"이다. 즉 강을 기준으로 강의 북과 강의 남쪽이다라고 말하면 정말 그러냐고 되묻는 낯선 풍경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듯이, 갑자기 "북미 캐나다"라는 단어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북쪽에 있다는 그 평범한 단어의 뜻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 의미는 미국이라는 나라도 멀고 먼데 그보다도 더 북쪽에 있는 아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라는 가늠할 수 도 없는 거리감으로 다가오게 되는 어이없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5초. 단 5초였다.

약간의 메슥거림이 안정을 찾은 후. 그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던 5초 후에 갑자기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던 것처럼 커다란 깨우침의 목소리가 내 머리 저 깊은 곳에서 메아리쳐왔다.


아내의 말속에 "나"는 어디 있는가!


아내. 아들. 캐나다.

그런데. "내"가 없다.


그렇다면 그 길게 느껴졌던 5초 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일단 안도감이었다. 대출받아 아내 몰래 넣었던 주식계좌의 3천만 원이 반토막 나서 1500만 원으로 내려앉은 마법 같은 경험을 하고 있던 시기라 그것을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가장 컸다.

두 번째는 아직까지는 쓸만한지 결혼기념일이나 아내 생일과 같은 자주 잊었다가는 몇 년간 핀잔을 들을 만한 "잊으면 안 되는"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나를 토닥였고,

마지막 하나, 이게 가장 문젯거리였는데 역시 "돈"이었는다. 정확한 액수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많이 준비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통보와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롯이 혼자만의 잘못인 앞의 두 개보다는 훨씬 가벼운 느낌이었다. 없으면 그만이니까...


그 모든 것을 느끼는 데 걸린 시간이 5초 정도였다. 준비의 부담보다는 들키지 않아 가장으로서의 체면이 더 이상 깎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크게 한숨 쉬던 시간도 잠시...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없다는 사실은 1500만 원이 사라진 내 주식계좌를 바라볼 때 느꼈던 상실감의 몇 배나 되는 "잃음"의 섭섭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두렵고 불안했던 시간을 빨리 덮고자 했던 나는 그 상실감을 느낄 새도 없이 아주 인자하고 이해심 많은 대한민국 남편이 되고자 한마디로 답을 했지만 생각만큼 멋지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가야지..."


왜 그랬을까? 아직도 나에게 이 대답은 미스터리다. "가고 싶어?", "캐나다는 왜?", "어떻게 가 거기를?", "안돼!!!", "하하하! 캐나다? 생각 좀 해보자!", "장난해?", "누가 간데? 그래서 가고 싶어 졌어?"등등등...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반문들이 많았을 텐데.


나는 결국 내가 생각해도 가장 모양 빠지는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말은 최악의 표현이었다.


"가야지..."


왜 그랬을까?

아내의 문장 속에 "내"가 없음을 알고도 "나는?" 혹은 "같이 가는 거지?"라는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키는 당당함이라도 보여줬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랴. 눈은 초점을 잃었고 어깨는 처졌으며 당당한 적이 언제였던지 기억도 안나는 나의 목소리는 물에 젖은 솜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래서 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로 한참 잘 나간다고 혼자 착각했던 시절, 중 고등학교 가정 기술 교사로 근무했던 아내를 만나 서울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방에서 폼 잡고 살게 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던 그때.

학번으로는 7학번 차이고 나이로는 6년 차이인 아내는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단순히 나이 차이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 "사모님"소리를 들으며 TV를 틀면 매일 나오는 누구누구의 아내로 눈치 보지 않고 "지방"에서 "지역유지"로 계속 믿고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혼 7년 차가 되던 20011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하하던 그 해.

많은 회사원들이

-소위 조직이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직과 회사를 먹여 살린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 하루하루 출근하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죄를 짓는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오만방자한 그들 중의 하나-

그러했듯이 여러 문제로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끼던 중

어느 날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났다. 두 곳의 지역 방송사 생활을 합쳐 15년 만이었다.


그 당시 며칠을 고민하던 나에게 아내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씩씩했던 남편이

무엇이든 해낼 능력과 자신감이 있는

"아저씨"라고 믿었는지 단 한마디로 응원해 주었다.

그래 여보! 해 보고 싶은 거 해! 나중에 하다 하다 안되면

"치킨집"이라도 하지모!

내 나이 40살 여름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진짜 동네 "치킨집"을 하게 될 줄을...


야구중계를 10여 년 이상 해왔던 터라 가장 자신 있었던 분야로 뛰어들었다. 그것도 아주 폼나게 서울로 말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 인터넷 유료방송 서비스 초창기에 한 통신사에서 시작한 프로야구 편파중계의 캐스터로 3년간 소위 말하는 "프리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차피 그동안 10년 이상 지역을 연고로 하는 프로구단 중계를 하면서 알음알음 알게 된 그 지역 야구단의 선수, 감독, 프런트 직원들과의 유대감이 깊었던지라, 편파라는 단어는 이미 생활에서 익숙해졌었기에 이보다 나에게 완벽한 직업은 없었다.


그리고

역시 돈이 좋았다.


직장생활 당시 매달 새벽까지 이어지는 회식 후 다시 새벽 아침 뉴스까지 소화해내는 강행군이 익숙했던 나에게 일주일에 한두 번 KTX를 타고 서울 상암동 중계센터로 일을 핑계로 서울 나들이를 가는 일은 일종의 "놀이"였다. 그리고 그 일의 보상은 직장생활 당시 받았던 월급의 몇 배가 훨씬 넘었다.


그 당시 나는 웃었고 집사람도 웃었으며 아들 또한 매일이 즐거웠고 하늘도 일주일 내내 맑았다.


인생은 하지만 "역시" 그러했다. 구름과 비와 천둥과 벼락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을 그때는 몰랐다.


대기업 통신사에서 기획한 방송이라 계속 이어질 거라 믿었던 프로그램이었지만 그 당시 잘 나가던 사장님이 여러 문제로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며 그가 기획했던 프로그램들은 폐지되기 시작했고

우려했던 것처럼 나의 "밥벌이"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백수가 됐다.


내 나이 43이었고 겨울이었고

아내는 잘 나가는 나를 믿고 아이의 공부에 올 인 하겠다며 휴직 중이었으며

우리 집 귀하디 귀한 장손은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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