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기러기 아빠들을 위한 옹졸한 변명. 3-돈

by Toronto Jay
돈이 없는데 어떻게 거길가?

그랬다. 진짜 돈이 없었다. 전세로 살았던 작은 아파트 보증금을 빼면 당장 다음 달부터 먹고살 걱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백수로 가끔씩 들어오는 기업체 강의와 일회성 야구중계 외에는 고정적인 수입이 없었고 그사이, 더 이상 미래를 맡기기엔 그 믿음감이 바닥을 쳐버린 남편을 바라보던 아내는 기간제 교사로 일하던 학교를 나와 수학 전문학원을 차려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으나 그것 또한 생각만큼 수입이 많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저 멀리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캐나다"를 가겠다고 하니 짧은 머리의 나로서는 사실 혼자 웃음이 나왔다.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순간 이 말이 하기 싫어졌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거길가?"


이 말속에는 하나 있는 귀한 아들 외국서 공부 좀 시키겠다는데 그거 하나 못해 주는 능력 없는 남편을 인정하는 일이며 하늘의 별도 달도 따줄 수 있다고 호기롭게 얘기했던 키다리 아저씨는 현실에 없으니 "자각"해야 하며 지금 우리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이나 하고 있냐는 핀잔이 동시에 들어있는 말이기도 했다.


당시 상황으로는 캐나다는 커녕 제주도 한 달 살기도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혹시? 로또?

하지만

매주 복권을 꼬박꼬박 사 왔던 나는 그 몇 주간 대전에서 1등 당첨은 없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 또한 불. 가. 능. 한. 일이었다.


결국


어차피 현실성이 없는 말이다!라는 결론에 이르자 "나"는 아주 너그럽고 인자한 남편이 되어 버렸다.

그냥 하는 말이니 그걸 애써 못한다라고 못 박을 일이 있는가? 이거였다.


주눅 들었던 몸이 되살아나고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어차피 못 가는 거 마음만이라도 너그러운 천사표 남편이 되자. 여기에 생각이 이르렀다.


이건 페이크다!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여보 그래~ 캐나다 좋겠다~그렇지? 언젠가 꼭 보내줄게!"

이렇게 말하며 꼭 안아줄 요량이었다.


나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목소리는 따듯했으며 위로하듯 아내에게 다가가는 나의 몸짓은 믿음직했다.

최소한 내가 생각하기엔 말이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여보~" 까지만 말할 수 있었다. 그 뒷말을 하기도 전에 아내의 입에서 이 얘기가 튀어나왔고,

나는 의자와 의자 사이에서 저리도 못 가고 이리도 못 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집사람의 이야기를 벌 받는 자세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돈은 내가 알아서 할게." 아이 영어 공부도 좀 시키고 여보도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도 좀 하고 나도 한숨 돌리고 올게.

단. 호. 했. 다.


그때는 진짜 몰랐다 그녀에겐

"계획이 다 있었다는 것을"


나의 아둔한 머리로는 도대체 계산이 되지 않았다. 일단 피해야 했다. 전형적인 문과인 나는 특히 수학까지도 갈 것 없이 산수에 약하다. 아니 못한다.


없는 돈이 어디서 나오지? 계산이 안되었다. 얼마 전 무리해서 수학학원을 차리느라 대출까지 끌어 쓴 것을 알기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아내 앞에서 버틸 수 없었다. 진짜 묻고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몰아치기보단 잠깐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는 내속에 나를 살리기 위한 나보다 똑똑한 또 다른 존재가 있음을 이날 똑똑히 느꼈다.

그게 수호신이든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알라신이든 말이다.


정말 묻고 싶었다.

"여보? 돈 있어?"


하지만 당연히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렇게 이미 결정되었던 형식적인 상의가 끝난 후 나는 거실에서 "캐나다 유학 비용"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하면 할수록 이것은 현실성 없는 계획이었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당시에 기억을 떠올려 보자.

그 당시의 엄마와 아이 둘의 캐나다 유학비용은 대략 이러했다.

당시 시세다.


2인 왕복 교통 비용/300만 원, 방한칸 룸 렌트 석 달 비용/450만 원, 아이 학교 등록 석 달 300만 원

핸드폰 인터넷 통신료/20만 원

차량 렌트와 문화생활은 고사하고 먹고사는 식대조차 포함하지 않고 여기까지 계산이 되자 나는 그냥 컴퓨터를 꺼버렸다. 역시 우리에겐 현실성이 제로인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실없는 얘기를 할 사람이 아닌데...

웃으며 잠들다 걱정되어 깨다가 나를 원망하다 궁금해하다 그렇게 길고 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 궁금증은 이틀 후 아내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풀리게 되었다

역시 그녀는 계획이 다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 이후의 계획까지 다. 있었다.

남편 능력의 부재는 본능적인 모성애가 발동하여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 있었던 거다.

그녀의 계획은 이거였고 그대로 진행이 되었다.


더 이상 생활능력이 바닥을 치는 남편을 믿고 지내다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미래까지 불투명해진다는 생각하에 아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끌어내고 있었던 거다.


우선 큰 처형의 딸과 친구 둘을 합쳐서 셋을 유학생팀으로 만들어 비용을 받고 케어를 하겠다는 거였다. 거기에 한국 수학학원에서 했던 프로그램을 가지고 캐나다 현지 장단기 초. 중. 고등학교 유학생들을 모아서 한국 수학과 캐나다 수학 과외를 시작해서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계획이었고, 한 달 전부터 아이들을 모아서 이미 과외 스케줄을 다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돈을 벌지는 못해도 아이 학교 보내며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놓았던 거다.

대견하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고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나는 한국 남자였다. 이 와중에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으니.


"나는?"

이거였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내가 가장 잘한다고 국가에서 인정해준 국가공인 자격증이 있었다는 걸

아내는 알고 있었다.

여기 캐나다에서도 인정해주는 아주 중요한 자격증!!!


바로 운전면허증이었다.


그것으로 아내는 몇년이 지난 후 나에게 직업을 주었으니...

그래도 나를 잊지 않고 챙겨준 그 무엇인가는 저 글 아래 소개한다.



3 달이라고 했으나, 3달이 아니었고, 그 당시 아내가 한 말에 함정이 있었다는 것을 8년이 지난

지금에야 깨닫고 있다.


"여보 나 경민이랑 캐나다 갈래"

이렇게 말했었다 분명!


분명히 나는 알았어야 했다.

"여보 나 경민이랑 캐나다 갔다 올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그들은 2014년 가을 한국을 떠났다.

*3개월 얘기는 아내의 트릭이었다. 가기 전 처형 조카와 친구들은 이미 일 년짜리 비자를 받고 출발했다.

*또한 현지 아이들의 수업도 일 년짜리 프로그램으로 짜 놓고 있었다.

*정확히 3개월이 되던 날 나는 잠깐 아들 보러 오라는 아내의 부름에 난생처음 캐나다에 갔으며

*그곳에는 생전 처음 보는 많은 아이들이 한집에 있었고

*그 이후 8년의 시간이 흘러 정식 사업체가 되었고

*그 귀한 장손은 고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퀸즈대학교 스미스 스쿨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천개의 섬이 있는 아름다운 킹스턴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으며


*나는 지금 그 사업체의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의 현지인인 친구 브라이언과 언젠가 아이스하키 중계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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