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겸손" 그거 하지 마!

세상 속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아빠가 하고 싶은 말.

by Toronto Jay


요즘 주위를 보면 소위 "대치동식" 자식교육에 "과"하게 올인하는 부모들이 자주 눈에 띈다.

영혼까지 갈아 넣다 보니, 웬만한 교육비와 과정의 어려움은 그들에게는 별의미가 없다.

어차피 자신이 "맞다" 그리고 우리 애는 "다르다"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교육관에 대한 맞고 틀림의 논쟁은 종교나 정치 이야기처럼 끝이 없는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괴롭다.

아니 힘들고 진절머리가 날 때가 많다.


배변선생을 따로 두고 이름난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것이, 다른 아이들과 이미 "다름"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소위"제이미 맘"을 현실에서 직접 본다는 것은 놀이동산 귀신의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 무섭다.


그 패러디가 섬뜩한 이유는, 과장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한 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도 바로 얼마 전 "그분"이 계셨다.

그리고 참 비슷한 그분들이 모여 계셨다. 신기하게도 그분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고 무척 친하다.


정도나 패턴의 차이는 있지만,

수백만 원 교육비를 내버린 학원에서 "상위 3프로 영재"로 인정받아 기쁘기만 한, 수많은 제이미맘들의 똑같은 교육철학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놀랍게도 "겸손"이었다.


저는요, 아이에게 꼭 하는 얘기가 있어요. 저희 집의 교육철칙이죠.

바로 아이가 "겸손"하라고 귀에 못이 박히며 교육한답니다.

진짜 그런 아이로 키울 거예요.

한번 보시겠어요?


헤이~ 제이미!

엄마가 머라고 했지? 너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겸손! 겸손!


보셨죠? 까르르...


이것 봐요. 이런다니까요 저희애가!

올림픽 금메달 따온 선수의 엄마처럼 세상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본다.


한 달에 수백만 원을 쓰며 여러 선생을 둔다.

"영재인 듯해요"라는 말에 허전한 자신을 채우려 돈을 뿌려댄다.

배변교육 선생, 핸드폰교육 선생, 생활교육 선생이 등장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그들은 신기하게도 똑같은 자동차를 몰며, 똑같은 가방과 옷을 입고 입히며, 똑같은 운동화를 신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배꼽인사를 눈을 치켜뜨며 억지로 하고, 입으로 "겸손"을 외친다.


자랑스러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섭다.


왜냐고?

5살 아이가 "겸손"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부모의 소위 "있음"이 이미 뒷받침된, "나는 이미 가진 자다"라는 과한 "오만"이 존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겸손하기 위해 아이가 노력해서 가진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또 하나, 누구에게 겸손하란 이야기 인가? 모든 이에게? 아니면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에게만? 그것도 아니라면 나보다 잘난 사람에게도? 정말 그러한가?


쉽게 그리고 솔직해져 보자.

이것은 "나는 달라"라는 것을 기정 사실화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미는 남들보다 "많이 가지는 잘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라는 자기 최면일 수 있다.


남들보다 더 가지지 못하거나, 소위 사회적으로 덜 잘 나가게 되거나, 공부를 더 못하거나, 부족하게 되어도 너는 너보다 더 잘 나가는 그들에게 겸손해야 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과연?


너보다 잘생기고 키도 훨씬 큰, 아빠가 부자라는 너희반 철수가 이번에 또 전교 일등을 했다는데, 아들! 겸손해야 해 그 애 한테도! 알겠지? 이렇게 교육시킬 자신이 있을까?


그 애는 빼고 너보다 못한 아이들에게만 "겸손"하란 이야기인가?


당황스럽지 않은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경우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을 것 이기에.

내 아이는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나는 그것이 무섭다는 것이다.

생김, 체력, 환경, 지능의 "남들보다 뛰어남"이 전제되어 있기에

나는 아이들의 이런 "강요된", 그리고 교육적이라 "착각"하는 "겸손"이 두렵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세상 잘난 이들이 가득하다는 뉴욕 월스트리트 한복판에 입사교육을 받으러 도착한 아들의 "잘 도착함"의 카톡 문자를 받고, 나는 아비 됨의 완성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아들에게 멋진 아빠의 한마디를 던져주고 싶었던 거다.


좀처럼 무슨 말로 이 어린 사회 초년생. 그것도 자신의 어릴 적 꿈을 조금 일찍 이루어 낸 아이에게 해주어야 할까 고민해 보았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찾아낸 하나의 단어가 있었으니.

그것이 "겸손"이었다. 단 겸손해라가 아닌 "겸손하지 마라"였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겸손하지 않게 되도 괜찮다" 이거였다.


앞서 이야기한 소위 제이미 맘의 "겸손"에만 삐딱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동양철학의 경전이라 불리는, 공자 선생께서도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는 굉장한 책, 주역에 나오는 "겸손"에 대한 삐딱함도 가지고 있다.


점을 치는 주역 64괘 중 아무리 효가 동하여 변괘가 나와도 결코 나쁘게 결말지어지지 않는 단 한 개의 괘가 있으니 그 괘의 이름이 바로 "지산겸" 괘이다. 쉽게 말해서 "겸손"이란 말이다.


즉, "겸손한 것의 결과는 어떻게 하든 나쁘게 되지 않는다"라고 주역은 이야기한다.


주역을 쓴 사람은 정확하지 않고, 그저 주나라 문왕이 전해 내려오던 것을 형상화해서 괘사를 지었다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따져 묻고 싶다. 중국 주나라의 ""정도 되는 당신이기에 이렇게 자신 있게 "겸손"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냐고. 왕 되어보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읽어 본 적 있느냐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렇게 제이미 맘처럼 배변선생이나 핸드폰선생을 붙여주지 못했던 아비의 한마디 "훈수", 그것도 꼰대소리 듣고 싶지 않았던 아비의 한마디. 그것은 번개처럼 내 머리를 관통했다.

바로 이 한마디였다.


"겸손하게 되지 못해도 슬퍼하지 마라 아들아!"


이 세상 그 어떤 부모가 자식이 남들보다 못하기를 원하겠는가. 밟고 올라가지는 말되, 기회가 있으면 눈치껏 능력껏 앞서 갔으면 하는 것이 부모 마음이다. 그리고 남들보다 일찍, 많이 소위 "잘 나가길"원하게 된다. 그 마음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아들에게 꼭 일러두고 싶은 마음과 말은 이것이다.


혹시라도 아들아,

무섭고 황량하고 외로운 "세상"이라는 "광장"에서 말이다.

어느 날 혼자라고 느껴질 때, 뒤쳐진다 생각 들 때, 힘들어 울고 싶을 때 말이다.

"겸손하게 된 자"가 되지 못해 힘들어하지는 마라는 거다.


그래도 불어오는 봄바람에, 비 온 뒤 깨끗해진 뒷마당 푸른 잔디의 풀내음에, 떠올리면 따듯해지는 네 가슴속의 기억들에, 엄마와 아빠가 어루만져주며 토닥여주던 자장가 한 소절에 "겸손할 수 있음"을 떠올려 주기를 바랄 뿐이다.


겸손된 자를 원하는 세상에서 혼자 서게 될 아들에게 아빠가 전한다.


아들!

이제 너의 꿈을 펼치게 될 너른 들로 혼자 나서는 아들아!

"겸손" 하지 않게 됨을 두려워하지 마!


아들!

이제 혼자 서게 될 아들!

"겸손" 힘들면 그거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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