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칠

by 비상 시 출구

밀려오는 새소리와 파란 하늘

어제보다 못한 화려함이지만 기어코 올라서고 말 것이라고


건너가는 열차 속 향그러운 바람소리 들어보려는 사람

우린 눈이 마주쳤고 조용히 자리를 물려주더군


열차는 넝쿨 휩싸인 터널 속으로 향하며

끊어낼 것은 끊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가위는 집에 두고 왔다고 하니

잘 보라며 다시 말하더군


끊어낼 것은 끊어내야 한다고


검은 터널 밑바탕에 초록 물감을 뿌린 듯한 넝쿨더미

열차에 치여 떨어져 나가고

열차는 조금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다음 오는 열차

깨끗한 터널을 맞을 수 있겠지


어두움 속 지나며

미처 나가떨어지지 않은 넝쿨 줄기 하나

창틀에서 발견했다


떨어질 듯 말 듯 덜덜거리며 딸려오는 모습

열차는 실패했다


자를래야 자를 수 없는 인연의 실타래 속

날카로운 칼로 매듭 내리쳐도

삐져나온 실 쪼가리 하나


그 작은 하나가 있고 없고는

만물에 눈 뜨고 감는 것과 같은 이치


영혼은 자꾸 붙들리고 싶어하고

의탁할 대상을 눈 부라리며 탐색했고

그렇게 진화했다


그 작은 차이

일찍이 체감한 그림 그리는 옆자리 소녀


스케치북을 덧칠하며

자꾸만 삐져나오는 그림을 그렸다


사자 갈기 그림을 보여주며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우니

그림을 얼굴에 밀어넣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밖에 없을 거야

언젠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야


그리고 정차 시간 짧은 간이역에서

뛰쳐나가는 것이 아닌가


구겨진 그림을 펴서 다시 보니

사자는 온데간데 없고

그려진 것은 어린 날 완벽하게 그리려다

완성하지 못했던 기이한 도형 하나 덩그러니


펜을 한 번도 떼지 않고 이어서 그리길 고집했던 심보

색칠이 망쳤다며 밑그림에 힘을 주었던 화풍


열차는 터널을 빠져나와

오후 네 시 도시와 바다 사이를 가른다


창밖을 넋놓고 보며

어느샌가 사라진 넝쿨 쪼가리를 그리워한다


배경에 펼쳐진 수많은 나무들과

진행 방향으로 고개 돌릴 때마다

뚜렷해지는 지나간 것들


지나간 것들은 여전히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간 것들은

여전히 뚜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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