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 자주 쓰다보니 첫 글자 쓰기도 전에 쏟아내야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첫 문장부터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요약한 문장 뽑아내야 한다. 우린 그걸 두 괄 식 이라고 부른다. 두괄식 덕에 그럴 듯한 문학가 본지 오래다. 느림은 아직 남아있다. 거북이 홍대 8차선 도로 한 가운데 올려둬도 한 발짝 씩 나아가는 수 밖에는 없다. 인간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만 행동한다. 풍선빠지 듯 빙빙 둘러서 시작하는 말들에 흥미가 있다. 프루스트가 마들렌 홍차에 찍어먹으며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날은 맑은데 비 냄새가 난다. 비가 오려나 보다. 비오는 날에 맺어진 이야기 더미도 줄줄이 낚시대에 걸려 올라오는 법.
모든 사고는 예견된다는 말이 있다.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작은 수십 개의 사건이 발생하고 그에 앞서 아주 작은 수 백개의 사건이 발생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숨을 쉰다. 당신이 이 자리에 나와 있는 한 단 한 번도 끊긴 적 없다. 연결되어 있다. 단 한 번도 동떨어진 적 없다. 다시 돌아가서 당신 입에서 나온 그럴 듯한 첫 문장을 고심하지 마라. 머릿 속에 떠오른 아무 말을 내뱉고 일단 시작부터 하라. 그리고 천천히 찾아가라. 비오는 날 아스팔트에 생긴 작은 시냇물 따라 가 올라가보면 조금 더 큰 본류가 쏟아지고 있다. 그 본류는 어디서 왔을까. 끝이 없다. 연결고리는 결코 끊어질 일이 없다. 가장 작은 아스팔트 시냇물과 가장 커다란 본류가 시작과 끝일까. 아니아니. 말했지 않나. 가래떡 자르 듯 처음과 끝은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차라리 떠오르는 모든 개념은 개별적으로 자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게으름뱅이들이 있다. 그러나 아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보다 명확한 논증은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 나처럼 연결식 사고 지니다 보면 자연스레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구분도 불명확해진다. 과거와 미래도 현재의 연장선이고 어느정도 예측가능하다는 오만에 이르기도 한다. 잠시 이렇게 놓인 시간 선을 들여다 본다. 일차원적 한 줄로 직 그어진 수직선. x축 y축을 배우고 과거 현재 미래가 그 안에서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인지했다. 삼차원으로 블랙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비 냄새는 아직 맡아진다. 한여름에 비가 온 것은 한 해도 빠짐 없었다. 언제나 기대와 실망은 두 가면을 쓴 하나의 멍멍이였고 꼬리 흔들며 살갑게 다가오는 멍멍이를 언제나 거절하지 못했다. 글쎄, 오늘은 잠시 고갤 돌려 못 본 척 해본다. 하나에 담긴 둘을 이제 당연하게 받아들여본다. 지금 내 머릿 속엔 꼭 하고픈 말을 시작부터 잡고 있다. 그러나 생각보다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독자들은 부디 지치지 않기를. 명확하지 않은 문장엔 잠시 숨을 고르기를.
연결된 흐름은 나를 지치게 하기에 이르렀다. 눈을 뜬 이른 아침 문득 나의 시간선은 고장 나버렸다. 과거와 미래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어젯밤에 꾼 꿈을 빼놓을 수 없다. 전날 밤 가족들끼리 한바탕 수다를 떨며 하하호호 웃다가 오랜만에 주체없이 웃은 나머지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그때 문득 가장 행복한 순간을 지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차갑게 말을 건넸다. 사람들은 가장 낮은 곳까지 떨어지면 이제 올라갈 구석 밖에 없다고 위안하고는 한다. 그렇다면 가장 고점을 찍었을 때도 내려가는 길만 존재하는 게 이치이지 않나. 그날 밤 문득 이런 연결고리 가지고 눈물을 머금었다. 다시 꿈 이야기로 돌아가서, 꿈 속에서 나는 모든 인생을 통틀어 스톱을 외칠 구간을 살펴보고 있었다. 기억이 시작된 시점부터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는 미래 사이를 오가며 가장 확실한 순간을 모색한 결과 죽음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금 내 옆에서 밝게 웃으며 춤을 추는 저 아이가 스스로 화장실 걸어가지 못하는 순간 다가오고 병상에 누워 마지막 말 한 마디 간신히 뱉는 순간은 언젠가 다가올테고 그건 비단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부모와 돈이 부족하면 언제고 보내주던 누님과 놀이터에서 앞니까 부러졌다며 이 하고 웃던 동생까지 우린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숨을 내뱉는 순간을 맞을 수 밖에는 없다. 불필요한 시간을 버리고 하루하루 착실한 삶을 산다는 것은 이런 인식의 기반선에선 무용한 일처럼 느껴진다. 정말 그런 순간이 다가온다면 어떨까. 눈을 감고 그려본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병들어 아파하는 모습. 그 앞에 허리 굽어 나이에 걸맞은 행태 취하려 애써 마른 침 삼키는 나. 남겨질 사람들. 홀로 깨어난 아침. 따뜻하게 안아주던 사람들. 매 순간 현재를 살면 되는걸까. 울컥울컥 피어오르는 미래에 대한 기억은 꽉 쥔 두 손 자연스레 힘을 놓게 만든다. 모두 사라질 것. 이곳도 일 백년 전에 없었다. 황무지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