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을 준비하던 중 남는 시간이 생겨 그동안 못했던 일들을 바쁘게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간다. 그러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모델 장윤주 씨가 얼마 전 오랫동안 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회의감이 들어 힘들어하다 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며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존재가 우리 임을 느꼈다는 영상을 봤다. 이것이 생각나 답답한 마음에 스쿠터를 타고 밤길을 돌아다녔다. 비오기 전에 올라오는 아스팔트 냄새를 맡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시끌시끌한 번화가를 지나 한산한 골목길도 둘러보았다. 아직도 난 그런 빛나는 깨달음이 오지 않는 걸 보면 나는 내 자신과 별로 친하지 않나 보다.
비가 오는 다음날이 되니 웬일인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들끓었던 마음들이 빗방울에 가라앉아 땅속으로 스미듯 오랜만에 드는 평화에 오래전 할머니가 해주시던 오리백숙이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닭을 좋아하셨다. 드시고는 싶으신데 풍이 걱정되셔서 간간히 오리백숙을 해서 꼬독꼬독 말려 수분 기를 쪽 뺀 후 칼로 껍질과 살을 잘라주셨다. 쫀득쫀득한 오리백숙에 반쯤 익은 김장 김치를 가늘게 찢어 올려 혀부터 반갑게 마중 나와 먹다 보면 입 주변이 어느새 기름범벅이 되곤 했었다.
이제는 추억의 음식이 돼버린 오리백숙이 생각나 조금은 다르지만 아는 게 도둑질이라, 그래도 약간은 비슷한 베이징 덕을 소개한다.
베이징 덕은 원래는 중국 남방의 음식이었으나 수도가 북쪽으로 바뀌면서 남방의 요리사들이 북방으로 올라가며 변형된 요리이다. 처음에는 찌는 형태에서 점점 굽는 형태로 바뀌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껍질이 그렇게 바삭거리려면 수분이 없어야 한다. 누룽지가 바삭하게 부서지며 고소한 맛을 내는 것도 그만큼 수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리는 닭과는 달리 껍질이 두껍고 그만큼 수분도 많이 함유하고 있다. 조리하다 보면 안에서부터 수분이 올라오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수분을 제거한 후 말려 굽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리 안쪽에 향신료와 설탕, 소금, 해선장으로 만든 양념을 바른 후 꼬지로 바느질하고 목을 접어 안쪽으로 넣어주고 바람 넣는 장비를 이용해 껍질과 살을 분리한다. 향신료와 식초 물엿이 들어간 물로 오리 껍질에 부어가며 살균하듯 익힌 후 말려준다.
마지막으로 오븐이나 에어 프라이기에 바싹 구워주면 우리가 먹는 껍질이 바삭하고 풍미가 좋은 베이징 덕이 된다. 이것을 야빙(베이징 덕 먹을 때 싸 먹는 것)에 오이, 대파. 오리 껍질과 살을 넣고 야장(전용 소스)을 넣고 싸 먹으면 된다.
오늘은 할머니가 해주신 오리 백숙을 먹을 순 없으니 수소문해서 베이징 덕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의 마음이 아직도 내 맘에 남아있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또한 중요한 듯하다. 사람이 있으니 연이 생기고 연이 있으니 업이 생긴다는데 내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 넉넉하게 살진 못했나 싶다. 물론 좋은 일도 했겠지만 자극적인 것이 기억에 더 많이 남다 보니 걱정이 되곤 한다. 좋은 업과 나쁜 업들이 쌓여 공으로 돌아가면 좋으련만 혹여 이것들이 따로 놀아 섞이지 않고 남아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 되려 그 업으로 남을까 걱정이다.
마흔이 넘었음에도 가슴속 불꽃은 아직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해마다의 다짐은 이뤄가는 노력보다 잊히는 것이 더 빠르니 내 삶은 20대의 나와 변한 게 없을 것이다.
오늘은 비도 오고 옛 추억에 취해있다 보니 내가 나로서 빛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낙관도 좌절도 아닌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두려움에 도망가지 않고 마주하는 것, 보고 싶은 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생각은 앞서되 현실 속에 사는 것들을 한 줄 한 줄 적다 보니 어느새 내 나이 앞에 서게 됐다.
마흔둘은 처음인지라 자주 삐걱거리고 서툴지만 그런 자신도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는 것이 장윤주 씨가 말한 빛나는 나로 사는 방법이 아닐지 어렴풋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