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 대신 어린 딸아이나 데려 갑서.”
조선 시대, 제주도에 왜적이 수시로 출몰해 피해가 많았다. 마구 가축을 잡아가고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겁탈했으니, 조정은 궁리 끝에 성을 쌓아 방어하기로 했다. 많은 백성이 부역에 동원되고 곡식을 바쳐야 했다.
그런데 너무 가난해 공출을 바칠 수 없었던 여인이 있었다. 남편 없이 다섯 남매를 혼자 키우던 그 여인은 신세를 한탄하다가 소리쳤다고 한다.
“곡식 대신 어린 딸아이나 데려 갑서.”
이후 공사장에는 원인 모를 사고가 속출했다. 성을 쌓기만 하면 무너져 내리고 사람이 다치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을 샀다”며 두려워하기 시작했는데, 지나가던 승려가 말하길, 딸아이를 바치겠다던 여인의 넋두리가 토신에게 닿았다며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면 해결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배가 고파 울던 일곱 살 아이는 그만 성 아래 생매장되었다. 그 덕인지 공사가 순조롭게 마무리되어 수산진성이 완공되었다.
그런데 성을 완성한 날부터 밤마다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용서를 빌었더니, 울음소리가 그쳤다. 그리고 관아에 청을 넣어 수산진성 안에 신당을 만들고 지금까지 제를 지내온다고 한다.
맛깔스러운 문체로 제주의 여러 설화를 소개하고 있는 이명진 수필가의 글에서 알게 된 설화이다.
수산진성 안에 모신 여신이라는 뜻으로 ‘진안 할망’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많은 이들이 와서 소원을 빈다고 한다.
설화의 내용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전승되어 오는 인신공양 혹은 희생 설화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어느 기록에서는 아이의 나이가 13살이라고 하고 다섯 남매가 아니라 열 명이라고도 하지만, 마을의 평안을 위해 아이를 제물로 바쳤다는 ‘속죄양’ 설화의 기본구조는 변함없다.
그런데 여인의 말이 내 마음을 심연 밑바닥으로 쿵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얼마나 힘들면 이리 무서운 말을 할까.
다 읽고도 ‘어린 딸아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마음의 벽을 두들겨 댔다.
오래전 대학원에서 민담을 공부할 때 자주 접했던 형태인데, 민담의 구조를 분석할 때도 많이 봤던 유형인데, 왜 이럴까? 손녀가 생겨서일까, ‘어린 딸아이’를 곡식에 대신한다는 말이 이렇게 아프니...
대학원에 갓 들어가 의욕이 가득할 때, 새로운 문학 연구 방법으로 등장한 신비평과 구조주의 비평은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러시아 학자 프로프의 민담 유형을 예로 들면서, 콩쥐팥쥐의 이야기로 표현되든 신데렐라 이야기의 옷을 입든, 주인공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구조는 동일하다고 설명하시는 교수님의 강의는 신선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해 많은 학생들이 구조 분석의 길을 열심히 걸어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곁가지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구조의 입장에서 보면, 불필요하거나 부차적이라 할 수 있는 요소들... 그동안 중심 기둥만 보느라고 관심 두지 않았던, 기둥 뒤 희미한 존재들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기둥에 가려 있지만 우리도 있다고, 이제 우리도 좀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진안 할망 설화에서 여인의 외침이 그랬다.
이 말이 없어도 이야기의 구조는 변함없다. 그런데 이 말이 날아와 가슴에 쾅 박혔다.
얼마나 살기 힘들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이 하염없이 번졌다. 이렇게 잔인한 말을 뱉어 놓고 죄책감과 후회로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아이가 생매장당한 후엔 어떻게 살았을까,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아이는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아이가 끌려갈 때 안 된다고 저지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까, 불쌍하기는 하지만 마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모두 외면한 걸까, 스님의 말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을까, 제사를 지낸 후 아이 울음소리가 없어졌다고 했지만, 울음소리가 귀에 쟁쟁하여 잠 못 이룬 자는 없었을까, 신당을 만들고 제를 지내 주니까 할 도리는 다했다고 안도했을까.
희생 서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시각에서 본 이야기이다. 희생된 속죄양의 내면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비명과 울음소리로만 남아 있다.
신화의 시대는 오래전 끝났지만, 제물을 바쳐 풍년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던 희생 설화의 그림자는 여전히 일렁이고 있다. 나라를 위해, 조직을 위해, 대의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켰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종종 들리니까.
그리고 그 희생을 가리켜 고귀하다거니, 존경스럽다거니, 최상의 수사로 포장하고 미안한 마음을 에둘러치는 일도 허다하다. 나만 안전하면 상관없다는 후안무치는 어째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다.
그 글을 읽은 밤, 자는데 웨엥엥 가는 모깃소리가 들렸다.
잠잠해져서 사라졌나 싶으면 다시금 앵앵거렸다. 결국 잠이 달아나 일어나 앉았다.
그 소리가 너무 가늘어, 힘없는 누군가의 울음소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