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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좋은 수필

세상의 모든 치(癡)를 위하여

- 한혜경 수필 "나는 길치버스기사입니다"의 극화

by 한혜경

2025년 10월 18일 대구 네이처 파크에서 열린 <가을문학 생태탐방>에 다녀왔다.

이 행사는 계간 <문장>지 산하 <수필과 지성> 주최로 네이처 파크의 아름다운 숲 속 야외무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여러 회원의 시 낭송과 다양한 연주를 거쳐 피날레로 수필극을 공연했다.


수필극은 수필을 원작으로 해 이경은 극작가가 극본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수필과 지성>은 "라온극단"을 만들어 매번 수필극을 연습하고 공연하고 라온 TV에 올리고 있다.


이날 공연한 수필극은 내 수필 "나는 길치 버스 기사입니다"를 원작으로 한 극이었다.


IMG_1757.JPG <나는 길치 버스기사입니다> 수필극 공연 무대


2015년 <김제동의 톡투유>란 프로그램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쓴 글이다.

그 프로그램은 매번 주제가 있어서 방청객들이 연관된 사연을 써서 낸다. 그중에서 몇 개를 선택해 그 사연의 주인공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듣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방청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 단상에 앉아 있는 초대 패널들이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진행이 격식을 따지지 않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데다가 방청객들이 모두 따뜻하여, 당시 종종 보던 프로그램이었다.


그날 주제는 '버스'였는데, "남편은 버스기사, 길치입니다."란 사연이 올라왔다.


기사가 길치라니, 그게 가능한가?


궁금한 마음으로 TV앞에 다가앉았다.


울산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아내는 입 다물고 있으면 세 보이는 인상이지만, 넘치는 웃음이 그런 느낌을 지워버렸다. 남편은 순박한 인상이었다.


남편의 길치증상은 연애시절로부터 올라간다. 경주 나들이를 가는데 좌회전 우회전을 못해 직진만 하다가 포항까지 갔고 할 수 없이 도로 돌아왔다, 수없이 처가에 갔지만 여전히 길을 모르고, 내비게이션 설명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버스를 운전하나? 운행 전날 미리 정류장과 길을 아내가 가르쳐주면 외우는데, 간혹 잊을 때엔 손님에게 물어본다. 정류장을 지나친 것도 모른 채 가다가 좀 이상해서 돌아보니, 지나쳐온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더라고. 그래서 다시 돌아가 태웠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이 노선을 자주 이용하는 승객들은 아예 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아 길 안내를 해준다고. 그러다 보면 이야기도 나누고 친해진다고. 승객들이 먹을 것도 챙겨주고 좋아해 줘서 행복하다고...

그래서 길치인데도 버스 운전이 적성에 맞는다는 모순이 성립한다.


그 장면을 보며 잠시 상상해 봤다.


승객들이 길 안내를 하고, 서로 안부를 묻고 음식을 나누며 함빡 웃음꽃이 피는 버스.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도 너그러워서, 정류장을 지나쳐 후진하는 버스를 보며, "아니, 저 기사가 미쳤나?" 하지 않고 "아하! 그 기사님이구나." 하며 웃어넘기고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대도시에서는 꿈꿀 수 없는 풍경이리라.


경쟁이 중요하지 않으므로 천천히 해도 괜찮고 실수도 용인되는 사회, 여유와 느린 속도가 용납되는 사회에서나 가능할까.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기 이전에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나와 달라서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대로 인정해 주는 동네를 잠시 꿈꿨던 시간이었다.



IMG_1726.jpg 공연 후 무대 인사




이 내용의 극을 관람하는 시간은 10년 전 생각해 봤던 꿈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었다.

극이 끝난 후 열심히 연습한 단원들과 함께 무대에 서서 인사를 나누며 마지막을 장식했다. 마침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단체로 관람하여 더욱 특별했다.

이경은 극작가는 특별히 이 어린이들에게 혹시 뭔가를 잘하지 못해서 음치, 박치, 길치, 미술치 등의 말을 듣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라고 전했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나타날 수 있으니 자신을 믿고 살아가길 당부했다.


먼 훗날 오늘의 공연을 떠올리며 길치라도 잘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세상의 모든 치들이 주눅 들지 말고 자신의 세상을 펼쳐 나가길 기원했다.


우리들 사방에 녹색 나무들이 싱싱한 잎들을 살랑이며 우리들을 축복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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