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아는 사람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by 한혜경
좋은 관계란 오랜 시간 함께 하지 않더라도 맺어질 수 있다.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몇 년 전에 본 영화 [벌새]에서 마주한 질문이다.


th.jpeg 영화 [벌새]


한문을 가르치는 학원, 중학교 2학년 소녀 두 명이 한문을 배우고 있다.

젊은 여성 선생님이 칠판에 한문문장을 적는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이다.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선생님은 음과 뜻을 알려 주고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일까요?”


나를 아는 사람이야 많지, 하며 소녀들은 킥킥거린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질문에 조용해진다.


“아는 사람 중에 여러분의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일까요?”


이어지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주인공 소녀의 얼굴은 훅 들어온 질문에 휘청 하는 듯,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이다. 아마도, 나에겐 없는데, 하는 막막함 때문이리라.


소녀의 집에는 가부장적 아버지에 생업에 바빠 살갑게 자녀를 챙기지 못하는 엄마, 수시로 동생들을 때리는 오빠, 공부 못한다고 구박받으며 밖으로만 나도는 언니가 있다.

학교에는 학생들에게 날라리를 적어내라고 윽박지르고 “우리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에 간다.”는 구호를 외치게 하는 교사와 수업시간에는 만화를 그리고 쉬는 시간엔 엎드려 자는 소녀 뒤에서 “쟤 또 자네. 쟤는 대학도 못 가서 나중에 우리들 파출부나 할 거야. “란 심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동급생들이 있다.


웃음을 주는 남자친구와 따르는 후배가 잠시 곁에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아빠나 오빠에게 맞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단짝 친구조차 다급한 상황에선 혼자만 빠져나간다.

한 마디로 마음 둘 곳이 없다.


이런 환경에서 한문선생님은 유일하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다.

소녀에게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고 만화 그리기라고 대답하자, 자신도 만화를 좋아한다고 말해준다.

오빠에게 맞는다는 얘기를 듣고선 맞서 싸우라고, 절대로 가만히 잊지 말라는 말도 해준다.


그리고 삶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는데, 어떻게 사는 게 맞는지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지만,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래서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음을 전해준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별다른 꿈도 없이 하루하루 무채색의 나날을 보내던, 앞날에 빛이라곤 기대할 수가 없어 “제 삶도 빛이 날까요?” 의문을 품었던 소녀가 이후 자신만의 세계를 이룬 어른이 될 수 있다면 잠시 곁에 있었던 한문선생님의 덕이리라.


좋은 관계란 오랜 시간 함께 하지 않더라도 맺어질 수 있다는 사실,

짧은 순간 스쳐간다 하더라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 한 남은 생을 의연하게 맞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해 준다.






나에게도 힘겨운 시간을 함께 나눴던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이젠 시간이 꽤 지나서 웃으면서 되돌아보지만, 당시엔 무슨 이런 일들이 일어나나 싶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실제 사실이 무엇인지엔 관심 없고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지가 우선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어제 한 말을 바꾸는 이들을 겪은 적이 있었다.

원래 사람의 선한 본성을 믿는 쪽이었는데, 이후 “세상의 본질은 어질지 않다”는 입장에 동조하게 되었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래도 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단하는 분들이 있었기에, 내 세계관이 더 비관적으로 흐르지 않을 수 있었다.


왜곡과 비방이 난무하는 속에서도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고 흔들리지 않는, 존경스러운 사람들이 소수지만 존재했다. 정도(正道)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세상이 이상하게 흘러가도, 정직하고 곧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


그들 덕에 약해지는 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고 힘겨운 고비들을 넘어갈 수 있었다.

내 마음을 알아주고 함께 있어준다는 것, 이해하고 격려해 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경험한 시간이었다.


영화 속 한문선생님의 말처럼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삶이라도 누군가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괜찮은 삶이라는 생각이 좀 더 확실해졌다.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는 삶이라면 고해라 할 만한 세상을 건너기가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며, 마음 둘 곳이 없는 이들 곁에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꼭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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