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웃는 이가 있다면
3월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때.
올해는 어떤 학생들이 들어왔을까 궁금해하며 첫 수업에 들어간다.
코로나로 한동안 온라인으로만 만나다가 교실에서 보니 참 좋다.
오랜만에 자기소개를 시켜봤다.
대차게 자기소개를 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수줍게 나이와 사는 곳을 말하는 학생도,
취미나 가족관계에 대해 말하는 학생도 있다.
몇 해 전 한 학생이 생각났다.
그 학생은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말한 뒤
"저는 내성적이라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해요. 제가 존재감이 없어서 주변에서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신입생 오티에도 갔는데, 갔다 온 줄 아는 사람이 없어요. " 했다.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데 익숙한 요즘 젊은이답지는 않았다. 키도 작고 몸집도 가녀리다.
고등학생 때 머리모양을 그냥 자라도록 내버려 둔 듯한 헤어스타일에 화장기 없는 맨 얼굴,
아무런 장식 없는 수수한 점퍼차림으로 눈에 띌 만한 요소가 없었다.
"존재감이 없다"는 표현에서 윤성희의 소설이 떠올랐다.
윤성희의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는 주목받을 만한 외모나 집안, 능력이 없는 인물들이
우연히 친구가 되고 함께 살게 되는 이야기이다.
어릴 때 쌍둥이 언니를 교통사고로 잃고 훗날 아버지마저 죽어 혼자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은
찜질방에서 W라는 여자를 알게 된다.
어느 날 목욕을 하고 나오다가 바닥을 닦고 있는 W의 발을 밟았는데,
다음날엔 목욕탕 문을 열고 나오는 W와 정면으로 부딪친다.
미안해하는 주인공에게 그녀는 괜찮다고 하면서 몸에 난 수많은 멍을 보여준다.
"하루에 수십 번은 사람들과 부딪쳐요. 가만히 서있는 내 발을 밟고 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미안합니다. 못 봤어요. 정말 사람들 눈에는 제가 잘 안 보이나 봐요." 하면서.
학창 시절에는 소풍 때 담임선생님이 그녀를 빼고 인원을 센 적도 있고
그녀의 짝은 한 학기가 지나도록 그녀의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유리창을 닦다가 2층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반 아이가 유리창을 닦고 있는 W를 보지 못하고 창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유령이었다.
일 년 넘게 만나오던 남자친구는 헤어지면서 "난 니가 무서워."라고 말했다.
그녀가 유령처럼 살아온 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꽤 유명한 배우였는데, W는 어머니가 배우가 되기 전 낳은 아이였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외에는 아무도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어머니가 유명해질수록 그녀는 더욱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W는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대신, 자신만의 처방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것은 매운 음식이다.
매운 음식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
W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주인공과 W는 친구가 되고 또 다른 상처가 있는 인물까지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는 이 이야기는
읽는 이의 가슴 한편을 따뜻하게 적셔준다.
우리 학과 학생이 소설 속 인물처럼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튀어야 산다"를 맹신하는 듯한 요즘 분위기에서 존재감 없이 지낸다는 것은 힘겨울 수 있다.
그래서 수업 때마다 그 학생을 눈여겨보곤 했다.
조별로 나누어 토의를 하던 어느 날, 활짝 웃는 그 학생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아봐 주는 친구가 있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행복을 체감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