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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혜경 Nov 24. 2023

겨울의 소설 (1)

이문열 [그해 겨울] 

영하로 급강하한 날.

겨울이다. 


길가 나무들의 잎들이 하나둘 떨어져 헐벗은 가지들만 하늘을 향해 서 있다. 

찬바람에 코트 깃을 올리며,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을 느낀다.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매서운 추위를 녹여줄 따스함이 더없이 그리운 계절이 왔다. 


이 황량한 겨울 풍경을 눈부시게 채색하는 것은 하얀 눈이다.

하얗게 온 천지를 덮은 눈 세계를 만날 때, 우리는 추위를 잠시 잊고 탄성을 터뜨리게 된다. 

촉감은 차가운데도 시각적으로 포근한 풍경 앞에서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겨울은 이중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찬바람과 추위는 분명 고통과 시련이지만, 주변 풍경을 하얗게 변화시키는 눈송이들은 아름답고 정결하다. 

척박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꿈의 세계로 넘어가는 문턱이 된다. 


그리고 일정 기간을 견디면 봄이 돌아온다는 희망을 안고 있기에 겨울은 암담하지만은 않다. 

또 작은 온기라도 나눌 수 있는 누군가 존재한다면 겨울이 춥기만 한 계절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겨울 이미지는 소설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봄을 맞기 위한 인내의 시간, 시련과 고통을 상징하는 한편, 하얀 눈이 만드는 정화의 세계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문열의 「그해 겨울」은 1979년 발표된 소설로, 한 젊은이의 겨울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제 그 겨울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는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어 감정은 많은 여과를 거쳐야 하며 과장과 곡필로 이루어진 미문(美文)의 부끄러움도 알게 되었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서른이 넘은 화자가 10년 전 겨울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젊은 ‘나’가 겪는 겨울은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입사(入社)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대학에 들어와 열렬한 사랑도 해 보고 이념과 문학에 빠져들기도 했으나, 21살 가을, 모든 것에 좌절을 느끼고 학교와 도시를 떠나기로 한다.

‘근거 없는 허무와 절망’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다가 시작하는 이 방랑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게 되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면서 끝이 난다.




여행의 초반 ‘나’의 모습은 ‘소년의 허영심’ ‘소년적인 흥취’를 지니고 ‘피상적 좌절’과 ‘원인 모를 슬픔과 허탈’에 빠져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동안 이념과 문학에 몰두했고 이데아를 탐구했노라 자만했으나 그의 감정은 원인을 찾기 어려운 모호한 감상에 자주 빠지며 정신세계도 미숙한 소년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실제 모습이 길에서 만난 폐병쟁이 사내에게 간파당하자 그전까지 유쾌했던 여행은 곧바로 ‘허망한 방황’으로 곤두박질친다.


또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약병을 지니고 다니지만 그의 머릿속의 죽음은 관념적 죽음일 뿐이다. “쓴 이 잔을 던져 버릴 것이냐 참고 마저 마실 것이냐”를 결정하기 위해서 바다를 향하는 모습은 비장함을 과장된 연기로 표현하는 연극배우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래서 그의 여행은 치기와 자아도취, 과장된 절망과 허무 등이 조금씩 섞인 낭만적 구도자의 방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겪는 것들을 ‘터무니없고’ 무의미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내가 지새운 피로와 번민의 밤’은 젊은이에게 허용되는 특권이자 젊은이다움이라 할 수 있으며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 헤맨 어둠은 진정한 성인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 의례의 한 과정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 여정에서 만나는 폐병쟁이 사내, 친척 누나, 칼갈이 사내 등은 각기 다른 형태로 인생의 여러 단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소년의 단계에 있는 그를 성숙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폐병쟁이 사내는 구도자연(求道者然)하며 떠벌린 그의 지식이 엉터리임을 깨우쳐준다. 학문을 탐구했다고 여겼으나 단지 허명에 갈급했던 것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친척 누나는 불행하게 끝난 사랑으로 얻게 된 깨달음을 들려준다. 곧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며 학교로 돌아가 ‘더 읽고 더 생각해’ 보라고 충고한다.


칼갈이 사내는 젊은 날 도모했던 꿈이 배신자의 밀고로 와해되어 19년간의 감옥 생활을 복수의 일념으로 버텨온 자이다. 그러나 막상 배신자가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을 목도하고는 증오를 잃어버린다. 

결국 바다에 칼을 던짐으로써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망집을 버리는데, 주인공 역시 가지고 다니던 약병을 던짐으로써 ‘감상’과 ‘익기도 전에 병든 지식’을 버린다. 

이로써 6개월여의 여정을 끝내며 소년의 시기를 마감하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보다 견고한 자아로 나아가기 위한 겨울 여행을 통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전형적인 통과 의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겨울이란 방황기를 지나고 난 그의 앞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필 봄’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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