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우리는 ⑬
1.
좀 더 뱃속에 있어야 할 아이가 세상밖으로 나와버렸다. 휴일, 동지가 지나자마자 발버둥을 치면서 엄마를 힘들게 하더니 한 달이나 빨리 세상밖으로 나와버렸다. 앰뷸런스에 실려 보낼 때까지도 설마 아이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분만실에 들어가자마자 의사가 오기도 전에 울음소리가 났다.
순하게 태어난 아이는 참 이뻤다. 간호사인 처형이 이렇게 예쁜 아기는 처음 본다고 했다. 아기를 보고 나온 어머니는 헐레벌떡 뛰어오셔서는 나랑 너무나 닮았다고 엄청 신기해하셨다. 예정보다 빨리 나왔지만 다행히 몸무게만 좀 모자랄 뿐, 비교적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손가락도 참 예뻤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2주 정도 지내고 체중만 늘린다면 퇴원할 수도 있다고 했다. 사내아이라 하니 처갓집 식구들이 많이 좋아하셨다. 어른들 마음은 모두 같았나 보다. 아내는 무탈했다. 너무나 무탈해서 간호사가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 두 번째 출산을 겪으며 아내는 아주 강한 아줌마가 된 듯했다.
며칠 후 아이를 보기 위해 병원에 다녀왔다. 병원엔 장인어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의사말로는 아이가 설사를 해서 잠시 금식을 시켰다가 아침부터 다시 특수분유를 먹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결국 힘들게 준비한 첫 모유는 먹일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아이가 무탈하기만 빌며 돌아서야 했다. 대신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아이 얼굴을 카메라폰으로 담아 올 수는 있었다. 아이와의 첫 조우. 안대를 하고 있었던 게 많이 아쉽긴 했지만 신비로웠다. 내게 벌어진 이 이벤트는 처음 경험해 보는 기적 같았다.
2.
오늘은 아내의 생일날.. 생각 같아선 재즈공연을 벌이는 레스토랑에 가서 근사한 저녁을 사주고 싶었지만 산후조리 중인지라...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 하여, 이것저것 집안일을 거드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저녁엔 친구들을 집으로 불렀다. 아내의 생일은 늘 이 친구들과 함께 해왔던 터라 아내의 허락을 얻어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중국요릿집에서 이것저것 시켰는데 내가 특별히 고른 누룽지탕을 너무나 맛있게들 먹었다. 식사 후 아내의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커피 한잔씩 하는데 내가 꽃바구니 받은 꿈 얘기를 하면서 우리 아들은 아무래도 꽃미남이 될 것 같다고 말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친구가 지 아들 넘 이름풀이를 해달라고 만원을 내밀었다. 새로 태어난 내 아들의 이름을 책을 보고 공부해서 직접 지었는데, 성명풀이한 걸 보더니 자기 아들 넘 이름도 풀이해 달라고 했다. 열심히 한자 획수와 발음을 따져 풀이해서 한글문서로 출력해 주었다. 녀석이 지불한 만원은 또 다른 친구의 막내딸에게 주었다. 니 아비가 열심히 이 아저씨 컴 손봐주느라 수고한 값이니 네가 가져가거라 하면서.
3.
언뜻 아홉수에 삼재라는 얘기를 들었었던 것 같다. 봄부터 갑작스러운 형의 사망과 끝없이 이어지던 주변인들의 부고 소식들, 수술, 뜻밖의 임신과 탄생 등 개인적으로 어마어마한 일들이 사나운 빚쟁이들처럼 들이닥쳤던 한 해였다. 극복이란 말은 사치로 느껴질 만큼 버티고 살아남는 것만이 미덕이었던 시간들이었다. 평소와 다른 가족들의 모습들을 보며, 트라우마라는 괴물이 떠올랐고, 두려웠다. 가족들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처럼 당당히 버티던 내가 사실은 가장 큰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는 걸, 내 몸에 탈이난 후에야 깨달았었다.
이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중 천사 같은 아이가 우리에게 왔다. 이 아이로 인해 부모님들이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는 걸 느꼈다. 이 아이로 인해 우리 가족들이 슬픔을 잊고 웃을 수 있게 됐다. 이 아이로 인해 우리를 고통 속에 밀어 넣은 운명과 조금은 화해를 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다. 신이 더 이상 우리를 고통스럽게 시험하지 않기를 바랐다.
[2007년 12월]
네버엔딩시리즈 1부를 마치고 브런치북으로 마무리합니다. 2부 시리즈는 너무 오랜 시간의 이야기인지라, 어떻게 써야 할지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 본 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분간,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쓰면서 틈틈이 고민해보려 합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인생을 사랑하라는 라틴어. 오늘 안태희작가님의 글에서 발견한 이 단어에 울컥, 하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일 년을 정리하면서 내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게 바로 이런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깨달음... 남들 보기에 하찮고 평범해 보여도 우리의 삶은 늘 아름다울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하여, 네버엔딩시리즈의 숨은 부제는 '아모르파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