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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둔 문제는 꼭 다시 문제가 되어버린다.

손톱 밑 거스러미를 내버려 두지 말자.

by Hannah

큰 아이를 낳기 위해 부산 친정으로 향했다. 그놈의 집구석에서 어찌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내가 안전하다는 생각하는 곳에 도착한 다음 날 바로 양수가 터졌다. 36주의 아기를 낳고, 삼칠일이 지나지 않았던 어느 아침 나는 방 안에서 아직 젖을 빨 힘이 없는 아이를 위하여 손으로 젖을 짜고 있었다. 산후조리사는 미역국과 밥, 그리고 여러 반찬을 식탁으로 옮기며 우리 아줌마에게 말했다. “딸기는 너무 차가우면 안 되니까 미리 냉장고에서 꺼내놓읍시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난 우리 아줌마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함부로 말하는 법도 누구를 평가하거나 화를 내시지 않는, 정말 점잖은 분이시다. 엄마는 그런 아줌마에게 안심하고 우리를 맡기고 밖에 나가 일을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벌으셨다. 깨끗한 옷과 깔끔한 집과 따끈한 반찬들. 모두 아줌마가 나와 언니에게 해주신 것들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무의식 중에 배웠고 아이들에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엄마는 육아를 잘 모르시는 분이기에 거실에 보송보송한 이불 위에 누워있는 손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름 최선의 육아를 하시는 중이었다.


모두가 평화로운 그 순간, 나의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고 그건 시모였다. 받자마자 시모는 내게 악을 쓰며 분노를 뿜어냈다. 이유인 즉, “네가 이런 시모는 상대 못하겠다고 내 아들한테 말했다며?” 남편은 시모와 말다툼에서 말발이 밀리니 ”남인 혜진이도 이런 말 할 정도로 엄마는 비정상이야! “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어서 내가 지나가며 했던 말을 이용하여 시모를 공격했던 모양이다. 연신 죄송하다며 무릎 꿇고 전화기 너머의 시모에게 사죄했다. 일 년 동안 내게 퍼부었던 막말이 다시금 나를 잠식하고 조정한 거다. 엄마와 아줌마와 조리사는 놀라서 방으로 뛰어왔고, 엄마는 전화를 가로채서 시모와 통화를 했다. 살면서 여러 진상들을 겪었던 엄마는 시모를 진정시켜 잘 달래었고, 사위에게는 혹여 혜진이가 그런 말을 했더라도 중간에서 전하는 게 옳지 않다고 가르쳤다. 극한의 스트레스로 나는 진정이 안되었고 펑펑 쏟아지던 젖이 급기야 한 방울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부랴부랴 분유를 사서 먹이며 마사지사를 집으로 불러 다시 회복하는데 애썼다. 나는 이제 엄마가 되었기에 결정을 해야 했다. 시가와 인연을 끊을 것이라고. 하지만 시모의 일련의 막말을 몰랐던 엄마는 이번 사건만 보고, 사위가 부족하구나 하고 판단하셨다. 그리곤 시모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100일 직전에 서울로 갈 것이라고 하였다. 일방적인 통보에 나는 별 도리없이 그 지옥으로 다시 돌아갔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의 가치가 알루미늄 포일이 구겨지듯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남편의 게으름과 더러움과 색정에 미친 모습을 마주했다. 최악인 것은 생활비가 90만 원. 왜? 나머지는 남편의 게임 현질과 기타 유흥비에 쓰느라 나에겐 돈이 없다고 했다. 그 당시 왜 나는 아이를 기관에 맡기고 일터로 나가지 않았나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완전히 마비가 된 것처럼 자아도 없고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똥멍청이었다. 나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방향을 제시해 줄 어른도 없었고, 그렇다고 따라 할 롤모델조차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육아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놈의 집구석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밖으로 나돌았나 보다.


시모는 만날 때마다 폭언이었다. 네가 이렇게 멍청한 줄 몰랐다, 임신이 유세나 왜 이렇게 잠이 많냐, 우리 아들이 원래 착했는데 결혼하고 나서 싸가지가 없어졌다 등. 그때의 남편은 무엇을 했냐고? 폭싹 속았수다의 영범이는 그래도 어머니! 어머니!라고 소리라도 쳤지, 이 남자는 관심 없는 남의 이야기 듣는 듯하거나 자리를 피했다.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출산 전부터 있었던 시모의 폭언과 남편의 무능함은 계속되었다. 나는 왜 애순처럼 대차지 않았나. 그냥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있어야만 아이를 지킬 수 있다 생각했다. 나의 아이들에게 단단한 가정이라는 것을 주고 싶었기에.


그렇게 꾹 참고 10년이 흘러, 2024년 8월 여름이 되었다. 그 여름은 더럽다 느껴질 정도로 끈적이고 더웠다. 아이들은 방학이라 시모가 운영하는 아침부터 여는 국어학원에 갔다. 나는 그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과 간식을 싸서 학원에 들러 넣어두고, 출근하였다. 점심시간의 반이 지났을까? 시모에게 카톡이 왔다. 큰 딸이 태도가 좋지 않아 쫓아냈는데 휴대전화도 없이 나가서 아직 안 돌아온다고. 너무 놀라고 손이 떨렸지만, 걱정 마셔라 하고 답했다. 1시즘 마치고 학원으로 가니 어디에서도 아이를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은 경찰서에 신고하고, 나는 그 일대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건물 CCTV를 보고 또 봐도 아이의 동선은 중간에 문 뒤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문을 어떤 남자가 잠시 후 따라 들어갔다. 건물 샅샅이 뒤지며 물탱크며 난간이며 옥상이며 두려움에 떨며 다 살펴봤다. 미칠 노릇이고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시모에게 단 한마디 안 했다. 걱정 마시고 어서 집으로 가셔라. 나머지는 나와 남편이 찾아볼 테니.


밤 10시 즘이 되어갈 때, 모르는 전화로 연락이 왔다. 어떤 할머니가 딸아이의 이름을 대며 00이 엄마냐고 물어봤다. 맞다고 하니 우리 집 앞 놀이터에 아이와 함께 있으니 어서 오라 하셨다. 가보니 내 딸이 거기에 할머니 세 분과 함께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분명 내가 그곳도 다 살펴봤고 경찰도 지나갔는데 왜 못 봤을까? 그냥 할머니 세 분이 있는 거라 생각하고 자세히 안 봤던 거지. 알고 보니, 아이는 시모한테 등짝을 후드려 맞고 쫓겨나서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죽고 싶었다 했다. 엄마나 아빠한테 연락하면 혼날 것 같아서 거기 놀이터에 있었는데, 할머니들이 근 10시간 동안 아이를 봐주셨단다. 고집이 만만찮은 녀석이라 엄마 전화번호를 대는데만 그 시간이 걸렸으니, 그분들의 정성 어린 관심이 아니었으면 어쩔뻔했나 싶다.


그 일이 나에겐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본인을 할머니로부터 지켜줄 수 없어서 아이는 엄마인 나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나조차 내 딸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남편에게 시모가 아이를 더 이상 혼내지 말았으면 한다, 그리고 주말에 아이와 함께 이야기해 보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 저녁,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시모가 아이를 테이블 건녀편에 앉혀두고 분노 섞인 폭언을 마구 쏟아내었다. “내 딸이었으면 머리를 다 밀어버렸어.” “내 딸이었으면 죽여버렸어.” 등


광기 어린 그 목소리는 십여 년 전에 들었던 것과 똑같았고, 눈은 이미 돌아가 있었다. 미친 사람이다.


더 웃긴 건 아이 아빠라는 사람은 벽에 기대앉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다는 거다. 나를 그 미친 여자에게서 지켜주지 못한 것처럼 내 딸도 지켜주지 않았다.


아이를 바로 분리시켜 내 차로 걸어가는데, 그 광기 어린 여자는 기어코 쫓아와 아이의 오른쪽 어깨를 세게 치며 길바닥에서 악을 질렀다. “내가 이렇게도 못해!!” 그러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정상적인 목소리로 “올라가라.”라고 하고 뒤돌아섰다.


나는 그날 결심했다. 내 아이들을 다시는 보여주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평생 그 징그러운 아들새끼 끼고 살며 늪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며 지옥으로 꺼져버리길 바랐다.


나의 손톱 밑 거스러미를 드디어 정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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