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따스함으로 이어지는 나의 점들
부산으로 이사와 언니네에서 4개월 정도를 머무르며 아이들 학교와 나의 직장 생활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언니에게는 사춘기 시기의 두 딸이 있었고, 여느 집처럼 여러 사연을 가지고 있다. 언니와 큰 조카와의 잦은 마찰, 언니와 형부와의 끊임없는 싸움, 둘째 조카와 내 딸과의 미묘한 신경전이 매일 있었고, 모두가 조금씩 지쳐갔다. 그러다 겨울방학이던 어느 토요일, 엄마네에 잠시 들렀다가 엄마는 내 아이들 앞에서 남편 욕하면서 왜 언니네에서 계속 머무르냐며 질책하였다. 언니는 엄마 편을 들었고, 왜 엄마가 사위욕을 못하고 내 눈치를 봐야 하냐고 했다. 모두의 관계까지 틀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바로 언니네에서 나와야만 했다.
사실 9월 27일에 언니네 들어가서 2달만 지내기로 했는데, 언니가 4월까지 더 지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천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거절했어야 했는데, 나는 이번에도 그러질 못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파국을 맞은 거다. 엄마도 언니도 내 돈을 빌려가면서 제때 돌려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단 한 번도 돌려달라, 언제 줄 거냐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10년 전 형부가 나에게 사기 쳐서 가져간 천만 원과 언니가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해서 내 새끼들 돌반지까지 모두 팔아서 마련해 준 500만 원도 못 받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바보일까?
여하튼 언니네에서 나온 첫날은 호텔로 갔다. 아이들과 단순 콧바람 쐬는 걸로 했는데, 다음날부터 모텔급의 호텔로 가서 2박을 더 해야 했다.
통장 잔고가 여유롭지 않기에, 그리고 하루빨리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야 했기에 돈을 아껴야 했다.
“엄마, 우리 오늘 밤은 어디서 자?” 나 역시 그 질문의 답을 몰라서 그냥 걱정마라고 했다.
방학이라 학교는 가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아이들끼리 낮 12시에 퇴실하여 학원 1군데 들리고, 내가 퇴근하는 4시간 동안 길거리를 배회했다. 춥고 배고프고 다리도 아팠다고 한다.
다행히 모텔 사장님은 싼 가격에 2박을 주셨으며 부동산 소장님은 내가 원하는 원룸을 바로 찾아 계약까지, 게다가 바로 다음 날 입주까지 가능하도록 해주셨다.
언니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라고 했지만, 바로 융통을 못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계약서 쓸 때 사실 잔금 2천만 원은 이틀 뒤에 나 가능하다고, 사실 초등 아이가 둘이 있다는 말을 차마 못 했다.
다음날 이사와, 월세와 잔금 처리해야 하는데, 어쩌지 못하고 뜬 눈으로 지새웠다. 모텔에 잠든 아이 둘을 두고 목 근육을 부여잡고 출근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다 겨우 임대인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 설명을 했다. 받기로 한 돈이 내일 들어오니 그때 드려도 되냐 그리고 사실 아이가 두 명이 있다고.
내 말에 울음이 있는 걸 눈치채셨을까?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고 바로 잔금은 다음날 해도 되며, 아이들이 있는데 여러 집기류가 필요하겠네요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릇, 수건, 이불, 컵, 세제 등을 가져다주신다 했다.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욱여넣고 연신 감사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퇴근 후, 길거리를 배회하는 두 아이를 픽업하여 새로운 보금자리로 들어갔고, 청소와 짐 정리를 하고 누웠다. 드디어 4개월 떠돌이 생활의 마무리를 하고 보금자리가 생겼다.
며칠 동안 겪은 추위를 아이들과 나는 평생 기억하겠지. 그리고 그 추위가 다른 이들의 따스함으로 녹여져 점처럼 남아 우리의 지난날이 될 거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다만, 언니네에서 나와서 갈 곳이 없어 동네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 안의 아이들이 볼까 주차된 차 뒤편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흘렸던 내 눈물은 아마 계속 상처로 남아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