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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모의 50억 재산 노리는 며느리

되바라지고 못때쳐 먹은 며느리

by Hannah

2012년 12월 22일 결혼식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다 끊어내야 하는 게 나와 아이들이 살아나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나와 남편을 이어준 사람은 미용실 하던 나의 이종사촌 오빠의 와이프였고, 그녀에게 시어머니는 올 때마다 재력을 대단한 마냥 자랑했다. 서초동의 아파트는 큰 아들, 공릉동 아파트는 작은 아들, 상가 몇 개는 어쩌고 저쩌고...


나는 당시 런던 올림픽 관련 업무 때문에 주말 근무와 철야로 몹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언니의 부탁으로 소개를 받았다.

매일 새벽 4~6시에 강남역에서 일을 마치면, 당시 남자친구였던 그는 억대 벤츠 스포츠카를 타고 나를 픽업하여 늦게까지 하는 일본식 선술집에 가서 정종을 한 병씩 마셨다. 너무 피곤했기에 데리러 오지 말아 달라는 나의 말에도 그는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픽드롭뿐이니 제발 하게 해달라고 했다. 나 자신이 피곤해서 거절했으나 그는 자기를 배려하는 말인 줄 알고 계속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원래 PC 방에서 새벽까지 게임하다가 6시 즈음 집에 가 잠을 자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컷 자고 오후 2시에 본업인 학원을 열러 출근하는 거였다.


나만 피곤해 죽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런던으로 출장을 갔고, 강도 최고조인 업무를 하다 보니 그가 그리워졌다. 이래서 워라밸이 중요하다. 사람의 판단력이 이렇게 흐려지는 일을 하다니! 엄마는 관상만 보고도 결혼을 반대했지만, 나는 오랜 외국 생활과 서울 생활에 외로웠고 힘들었고 지쳐 있다 보니 그 결혼이 나에게 안정감을 줄 거라 믿고 결혼을 강행했다.


결국 십여 년의 고부갈등, 남편의 방치, 생활고로 인하여 나는 2024년 9월 27일부로 남편과 완전히 육체적으로 멀어지는 방법을 선택했다. 절대 나이 드신 분들의 감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겪었다. 하지만 나는 겪어봐야 쓴 지 단지 아는, 약간 무식한 편이라 다시 돌아간다 해도 누군가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이혼 과정에서 시어머니는 나를 그들의 50억 재산을 노리는 못 때 처먹은 며느리로 둔갑하여 소문을 냈다. 그리고 나는 친정부모님이 50억 부도를 맞아 쓰러지셔서 요양을 돕기 위하여 두 아이와 부산으로 갔으며, 본인의 아들이 매주말마다 부산 오가느라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낸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뿌려졌다. 이 헛소리가 돌고 돌아 내 귀에도 들어올 거라는 걸 모르는, 정말이지 끝까지 추악하고 더러운 사람이다.


사실 그는 우리가 부산으로 이주하고 단 한 번도 오지도 않았으며, 그나마 이혼합의서 제출을 위해 법원으로 함께 가야 해서 부산에 딱 1번 왔었다. 그것도 아이들 안 보고 그냥 간다기에 내가 사정해서 호텔을 잡아주고 1박을 시켜줬는데... 그리고 그 1박 동안 잠만 계속 자느라 아이들은 방치되었었는데... 무슨 허무맹랑한 헛소문인가 말이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 본인의 멀쩡함을 남에게 어필하기 위하여 남을 깎아내리기에 가차 없었으며, 또한 거기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이라곤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흔해빠진 못때쳐 먹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나는 그런 인간을 격렬하게 혐오한다. 그리고 아무리 재미있어도 남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깎아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법은 정말이지 불에 달궈진 돌멩이 길을 밟아야만 알 수 있는가 보다, 나에겐. 그래도 남에게 상처 주지 않고 한층 성숙해지고 단단해지는 방법이라면, 어쩌겠는가. 걸어가야지. 그래야 나와 나의 아이들에게 든든한 사람이 되어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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