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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PAPA Aug 26. 2023

새로운 시작이 필요한 사람

D

학습된 무기력 [Learned helplessness]

심리학 용어로, 피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부정적인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어떠한 시도나 노력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고 여기고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즉 자신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결과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대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출처 : 두산백과 -


진정한 리더란 무엇일까?

역할과 정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난 구성원들의 성장을 돕는 사람이라는 맥락에 가장 크게 동의한다.


비록 작은 파트의 장이지만 처음으로 직책자를 맡았을 때 앞으로 경력 측면에서든 역량 측면에서든

최소한 휘하 직원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D는 내가 처음으로  직책을 맡고 처음으로 함께하게 된 소수의 부하직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특이한 삶의 이력과 경력의 보유자였다.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내고 일본에서 공부를 하여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했다.

무명이긴 했지만 방송계에서  꽤 오랜 시간 리포터 등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어,

회사의 영업 조직으로 특별 채용되었던 사람이었다.

중국이나 일본 관련 비즈니스를 진행할 때 그녀의 역량을 활용할 목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녀는 외모도 뛰어나고 늘 친절하게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하는 직무에서는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 Pixabay


그러다 몇 년 전 그녀는 영업 조직에서  지금의 우리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회사가 중국 쪽을 확장하려던 당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는 우리 쪽에 배치한 이유였을 것이다.

나와는 업무상 큰 접점이 없다가 내가 직책을 달기 전부터 같은 부서로 배치받아 1년을 같이 근무했었다.


그녀는 맛있는 간식을 챙겨준다든지, 누군가 심한 질책을 받거나 격무로 힘들어할 때

정서적으로 사람들을 잘 케어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정보를 검색하거나 예전 자료들을 찾는 일에 능숙했다.

여러 나라의 언어가 가능하니 활용할 수 있는 경로가 많기도 했고,

무언가 사소한 이슈들에 대한 기억력이 좋았다.


"그 일 몇 년 전에 당시 김 차장님께서 문제가 있었다고 말씀해 주셨던 기억이 있어요."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녀는 사무능력은 낮았다.

동료로서 지켜봤을 때도 그녀가 작성한 보고서는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졌고,

그로 인해 결국 상사가 직접 재편집을 하거나 다른 동료들에게 수정지시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더 다른 방향으로 사람들을 챙겨주는 본인의 장점을 활용하려 했었던 것 같다.


다음 해에 내가 작은 파트의 장을 맡게 되었을 때 부서장은 그녀를 내 밑으로 배치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새로운 트렌드나 시장조사가 필요했기에 나는 그녀의 장점을 잘 활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부서장에게 흔쾌히 동의를 했고, 그녀에게도 퇴근길에 함께 일해보자는 제의를 했었다.

그리고 그녀와 상하관계로 일을 시작하면서 리더로서 그녀의 문서작성능력을 키워주고 싶다 생각했었다.


"저한테 보여주시는 게 아니라 이 자료를 담당 임원께서 보신다고 생각하고 작업해 주세요."

"글꼴과 색상톤을 맞추는 건 가독성을 위해 기본적으로 꼭 필요해요. 늘 최종제출 전 한 번만 더 체크해 주세요."




좋게 표현하기도 하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하고, 직접 수정한 버전과 비교해서 보여주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내 생각보다 빠른 변화는 없었고 오히려 아주 기본적인 부분들마저 개선이 없었다.

문서작성능력보다 그녀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욕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자,

그녀가 업무시간 외에 사람들과 어울릴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오히려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거나 무언가라도 먼저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업무를 지시해도 물을 때까지 진행 상황에 대한 답을 전혀 주지 않았다.


[SBS, '파리의 연인' 중]


내가 정말 놀랐던 것은 본인이 자신이 없는 업무는 기한이 임박할 때까지 시작조차 않고 있던 때였다.

본인 스스로도 잘하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고민 하고 있었던 걸 수도 있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회피 성향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한 일에 대한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반복되는 조직생활에서 서서히 무기력에 잠식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해보자며 반년 정도를 계속 독려해 봤었다.

하지만 부서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들이 회사의 중요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었고,

나 스스로도 개인적인 삶이 바빠지며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어느 순간 나도 그녀까지 생각할 동기나 의지가 사라지고 말았다.


무서운 건 그러다 보니 나도 기존의 다른 상사들처럼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일을 다른 담당원에게 시키고 있었다.

일은 하는 사람들에게만 몰리고 다른 사람들을 활용 안 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도 바쁘고 급한 상황에서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판단한 우선순위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잡무를 처리하는데 주로 배정하거나,

그녀가 가져온 결과물에 대해 나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다음 인사발령에 부서장이 그녀를 다시 영업 조직으로 전출시킨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직속상인 내게 상의도 없이 의견을 넘긴 것이 충격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그녀를 주요 업무에 배정하지 않고 활용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비친 것이

암묵적 동의로 여겨진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지나간 후회이고 변명이지만 정말로 올해 그녀가 잘하는 장점을 더 부각해 줄 생각이었다.

꼭 업무시간이 아니더라도 점심 휴게시간 등에 그녀가 잘하는 외국어를 금씩 그녀에게 배워 보고, 퇴근 후에 잠깐이라도 PPT나 엑셀 작성 요령을 같이 볼 생각이었다.

발령이 나기 전 마지막 개인면담 때 그녀에게 직접 이 이야기 했었다.

하지만 적으로는 나도 아무것도 안 한  되었다.


늘 생각하듯 아무것도  안 하면 효용 100% 이지만,

뭐라도 하는 것이 후회도 덜하고 개인의 성장에 더 큰 결과를 낳는다.

미루지 말고 마주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회가 안 남는단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녀도 변화의 의지를 갖게 되었다는 것.

인수인계서 깔끔히 작성하고 떠났다.

메일로 남긴 마지막 인사말과 함께.


"새로운 저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 더욱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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