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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PAPA Jul 15. 2023

주변을 잘 되도록 만드는 사람

E

버프(Buff)라는 온라인 게임 용어가 있다.

일시적으로 아군의 공격력이나 방어력 등의 능력치를 상승시키거나 특수능력을 부여하는 효과를 한다.

친구들과 온라인 게임을 한창 즐겨하던 20대 초반의 시절,

내가 좋아하던 캐릭터 들은 상당수 주변 캐릭터들의 능력치를 향상해주는 버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현실에서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버프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종종 생각하곤 하는데,

회사 생활에서 만난 E는 대표적으로 그런 사람이었다.


몇 년 전 회사에서 해외주재원 예비과정을 진행한다는 공모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해당 교육과정의 총괄책임자가 바로 그녀였다.

언젠가는 해외에 정식 주재원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앞으로의 고난의 행군을 예상치도 못한 채 덜컥 지원을 했다.

운이 좋게 과정 대상자로 선발이 되었지만, 회사의 업무와 당시 돌이 갓 지났던 딸아이의 육아에 해당 과정까지 병행하는 건 만만치가 않은 일이었다.

계속되는 수면부족과 높은 합격 기준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귀신같은 타이밍에 그녀는 이야기를 꺼냈었다.


"잘하실 거예요."

"할 수 있어요!"

[MBC 무한도전 ROWING(조정) 특집, 목이 쉬도록 동료들을 격려하는 정형돈 님]


책임자였던 그녀의 사기 진작을 위한 말 한마디는 뇌리에 강하게 남아 과정을 마치도록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열정적으로 독려해 주는 사람을 목전에 두고 낙오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만 같아서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코로나 여파와 회사 내부 사정 등으로 실제 파견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면서 주재원은 기약이 없어졌지만, 성공적으로 완주를 끝냈던 당시의 경험과 격려의 메아리는 한동안 회사생활을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E 선배는 입사 직후 수년간 얘기만 들었던 미스터리의 인물이었다.

나의 사수였던 Y선배는 절친한 입사 동기였던 그녀를 늘 좋은 동생이라 칭찬하며 기회가 될 때 언젠가는 꼭 소개해주겠노라 얘기했었다.

같은 서울 내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본사와 떨어진 지점에서 바쁜 영업 직무를 맡고 있었던 데다가, 나의 입사 시기 무렵 신혼 생활까지 시작했기에 서로 굳이 시간을 맞춰 만날 여유는 없었다.

게다가 결혼 후 금방 아이까지 갖게 되어 그녀는 곧 휴직에 들어갔고, 이후 나의 장기 해외출장, Y선배의 퇴사 등 조우할 기회나 접점까지 사라져 버려 말 그대로 회사 조직도 속 인물로 남게 된 사람이었다.


그러다 내가 잠시 인사부서에 근무를 시작한 다음 해에 그녀가 사내 교육 담당 부서로 자리를 옮겨왔다.

실제 교육을 진행하는 업무가 아닌 교육제도나 과정을 기획하는 업무에 가까웠기에 본사 근무가 많았고,

내가 일하고 있던 사무실 뒤 편에 그녀 부서의 자리가 배치되어 있어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다.

그녀와 예전에 영업 조직에서 직속 상사로서 잠시 같이 근무한 경험이 있던 당시 우리 부서장도 그녀를 굉장히 아꼈고, 나를 포함한 몇몇 부서원들에게 그녀와 친분을 쌓는 식사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하였다.

그 후 나와 나의 단짝 후배 S, 그리고 그녀와 그녀 부서의 후배 한 명까지 마음 맞는 사람 넷이서 회사 인근 한 맛집에서 정기 점심 모임을 이어가게 되면서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업계 관련 전공 학과로 유명한 해외 유수의 대학을 나온 그녀는 한국에 돌아오기 전 외국의 큰 기업에서 근무할 기회가 있었다는 얘기를 당시부서장에게 전해 들은 적이 있다.

나중에 그녀가 직접 말해준 우리 회사로의 입사동기는 그녀의 전공과도 연관되면서도 세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는 많이 이상적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진심 어린 그녀의 열정과 애사심을 지켜보며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회사도 성장해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시간이 지나 그녀의 회사 생활에도 잠시 시린 겨울이 찾아오게 된다.

이례적으로 계열사에서 이동해 온 당시 그녀의 담당 임원이 본인의 요구사항을 잘 맞춰준다는 이유로 주변 모두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한 인물을 이듬해 휘하의 부서장으로 앉혔다.

모두의 슬픈 우려대로 해당 부서장은 담당 임원의 수행과 의전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새로운 리더십이나 업무 추진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회사 내부에서 소문이 다 퍼지게 될 정도의 부조리한 행위들로 그녀가 속한 부서의 저하된 사기는 곤두박질치고 부서원들의 불만이 폭증하기 시작했다.


한 해 가까이를 인내하던 그녀가 앞으로의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총대를 메고 담당 임원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이미 담당 임원도 해당 부서장의 실체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아무리 에둘러 잘 표현했다 한들 회사에서 그녀의 행동은 결과적으로는 하극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 해의 진짜 겨울의 계절이 다가오기 전, 그녀는 이미 면담을 신청하는 순간부터 마음속에 준비해두고 있었을 휴직 카드를 꺼냈 초등학교를 진학하는 아이를 1년간 돌보는데 집중하겠다며 잠시 회사를 떠났다.

그녀가 휴직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해줬을 때, 모두가 이미 알고 있을 일을 왜 굳이 나서서 얘기를 꺼냈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의 대답은 인상적이었다.


"다른 부서원들만큼은 조금이라도 나아진 분위기에서 근무하길 바랐어요."


물론 훗날 복귀 후 아주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고 웃으며 회고했지만.

[연상 이미지 - 샤를 7세 대관식의 잔다르크, 1854作]


그녀가 떠나며 남긴 디버프(de-buff, 버프의 반대말)의 영향이었을까.

다음 해 해당 담당 임원은 다른 곳으로 떠나가고, 해당 부서장도 모두의 예상대로 바로 좌천이 되었다.

그리고 계절은 다시 또 돌고 돌아 그녀도 다시 회사로 복귀를 했다.

원래 부서는 아닌 영업 부서로의 복귀였다.

기존 업무 경험이 있던 그녀가 충원에 꼭 필요한 자리기도 했고 본사 바로 인근의 지점이라 부정적인 이동이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좋은 영향력의 범위가 제한되는 것 같아 나는 내심 아쉬운 마음이었다.

조직적으로 그것이 좋은 부분이든 나쁜 부분이든 상위 조직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니까.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회사에 남아 후배들에게도 좋은 롤모델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그녀가 조직의 리더가 된다면 어떤 부서든 확실히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는 생각도 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으로 전혀 아쉬운 것 없어 보이는 그녀가 왜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지금도 사내에서 여러모로 투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지 나로서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녀는 스스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무척 부유한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티가 안 나지는 않았고 외형보다는 배포가 큰 태도에서 강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녀의 휴직 전 환송 점심 모임 에피소드.

단가가 꽤 높았던 식당에서 비용을 나눠 내자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귀하면 사달라며 혼자 일말의 망설임 없이 결제를 했다.

딸아이의 생일인 걸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가격대가 있는 장난감을 모바일 선물로 턱 하니 보낸 일도 있었다.

그녀의 복귀 후 같은 부모로서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대화를 나눴을 때, 거주지역이라든지 교육에 대한 소비 수준 등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그녀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여유가 많은 사람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었다.


최근의 점심 회합에서 추진 업무에 대한 고충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다가 그녀는 어떤 생각으로 회사생활을 지속하고 있는지를 슬쩍 물었다.

역시나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제 주변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 이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저와 가족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그녀의 말이 실제로 얼마만큼의 진실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녀만 알겠지만, 최소한 거짓이 아니라는 건 나도 확신할 수 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20대 초반 어느 책에서 본 한 구절이 생각났다.

'위선일지라도 최소한 선이 무엇인 줄 알고 실행한다는 점에서 위악보다는 낫다.'

그녀는 최소한 주변을 잘 되게 하겠다는 본인의 신념을 실행하고 추진하는 사람임은 확실하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녀는 식사를 하기 전 꼭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오랫동안 기도를 했다.

무슨 기도를 그리 오래 하는지 묻지도 않았고 앞으로 묻지도 않을 거지만 솔직히 가끔씩 궁금하기는 하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내려주신 사랑이란 뜻으로 조직 내 동명이인들을 포함해 많은 교인들이 쓰는 그녀의 이름.

하나님께서 진짜로 존재하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이 세상을 더 좋은 방향으로 잘 되도록 하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며칠 전 회사 컴퓨터 용량 정리를 위해 다운로드 파일을 지우다 연초에 그녀가 사내 메신저로 보내줬던 '레모네이드'라는 제목의 파일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다시 한번 회사 생활을 이어가는데 큰 격려가 된 응원의 메시지였다.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

(삶이 당신에게 레몬을 준다면, 그것을 레모네이드로 만들어 보세요!)


무더운 삶의 여름.
최소한 주변 사람들의 갈증만큼이라도 시원하게 해소해 줄,
그런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나 또한 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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