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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PAPA Oct 07. 2023

혜안을 가진 사람

C

오안(五眼) : 수행의 정도에 따라 갖추게 되는 다섯 가지 눈.

(1) 육안(肉眼). 가려져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범부의 육신에 갖추어져 있는 눈.
(2) 천안(天眼). 겉모습만 보고 그 본성은 보지 못하는, 욕계·색계의 중생이 갖추고 있는 눈.
(3) 혜안(慧眼). 현상의 이치는 보지만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구도자의 눈.
(4) 법안(法眼). 모든 현상의 참모습과 중생을 구제하는 방법을 두루 아는 보살의 눈.
(5) 불안(佛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부처의 눈.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시공사 불교사전(2003)


올해 갑자기 담당 임원이 바뀌었다.

조직 개편이나 사업 가속화에 박차를 가한다는 등의 명목은 분명 존재했지만,

전임자가 만 1년도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사실상 전임자에 대한 경질성 발령이었다.

조직에 한동안 꽤 큰 동요와 혼란이 있었다.

안 그래도 윗선의 교체는 수많은 새로운 업무보고와 업무 방향성 변경을 가져오는 데다가,

그 누구도 직전까지 예상치 못했던 공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에게 있어서는 친분이 깊은 C가 담당 임원으로 배정되었다는 것이 나쁘지 않은 변화이기도 했다.




신입사원 연수 때 주요 부서장들이 각 부서의 업무와 회사 생활의 노하우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강연자 중 하나로 참석했던 C를 처음 만났다.

'엄청 똑똑하지만 아이 같은 사람'

다소 순화해서 표현한 그에 대한 첫인상.

다른 입사동기들도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한 뉘앙스로 그에 대한 인상을 얘기했었다.

강연 내용은 아주 이해가 잘 되도록 전달되지만, 억지로 와서 대충 시간을 때우고 가려는 마음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것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저도 매일 시달리지만 그게 월급값이라 생각합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다른 부서장들과 다르게 신입사원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혀 얘기하지 않고 본인이 겪는 상황에 대한 고충과 현실을 여과 없이 전달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그가 가장 솔직했던 것이지만.


업무상으로는 거의 접점이 없는 부서였던 데다가 직급 차이도 큰 그와 직접 교류할 일은 없었다.

그러다 그와의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가 해외 프로젝트 파견이었다.

해당 프로젝트 책임자(PM)로 현지로 먼저 나가 주재하고 있던 인원 중 하나가 그였다.

같이 일을 해보니 그는 설렁설렁 대충대충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의심이 해소되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집요하고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가 가끔씩 자랑스럽게 일화를 늘어놓는 현지인들의 비리 두 건을 적발해 낸 것도 실제로 그의 집요함이 없었으면 불가했던 부분이긴 하다.


직접 겪어본 그는 다른 직원들이 모두 피곤해하고 어려워하는 성향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들은 적 있는 그의 부정적인 별명은 '초딩(초등학교 학생)'이었다.

단편적으로 식사 메뉴에도 무척 까다로워서 본인이 선호하는 메뉴가 아니면 아예 끼니를 거르기도 했고,

어떤 일을 추진할 때도 본인이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대답을 회피하거나 말을 흐리는 경우가 많았다.


"식사 안 가세요?"

"(오전에 배가 고프다는 말을 몇 번 했지만) 별로 생각이 없네."

"나가서 다른 것 드실까요?"

"나가서 먹을 게 있나. (제시해 보렴)"

"지난번 맛있다고 하신 면 요릿집 가시죠!"

"아 멀어서 귀찮은데... (다른 선택지는 없는지 설득해 보렴)"


겉모습과 다르게 의외로 내향적인 그는 친분이 깊어지기 전까지는 본인의 속내를 전혀 먼저 밝히지 않았고, 아랫사람들은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채널A, '금쪽같은 내 새끼']


아침, 저녁 날씨가 쌀쌀해지니 생각나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

같이 해외에 재류하는 기간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을 때의 일이다.

그가 주말에 구입한 점퍼를 사무실로 가져와서 나에게 한 번 입어보라고 권했다.

그에게는 맞지 않고 큰데 나한테 주면 딱일 것 같아 가져 왔다고 했다.

외모에도 많은 신경을 쓰는 그가 고른 옷답게 옷 자체는 디자인이나 색상 모두 좋았으나 팔길이가 내게는 짧았다.

손등까지는 애초에 못 오고 최대한 잡아당기면 손목의 시계 차는 부분까지 아슬아슬 도달하는 길이였다.

누가 봐도 남의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입을만하네. 비싼 거야. 옷도 잘 꾸미고 입어야 해. 현지 직원들도 한국 직원들이 추레하게 입으면 무시한다니까."


그가 나를 정말 위해서 준 것인지, 교환이나 환불이 귀찮아서 준 것인지 의아했다.

물론 높은 확률로 모두 다에 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추위나 옷매무새를 걱정한 것이라면 주말에 같이 쇼핑을 가자고 제안해 줬으면 더 감동받았을 것 같은 마음이긴 했다. 설령 옷을 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준 그의 마음을 정말 무시하기는 어려워 한동안 바짝 입고 다녔다.

그는 내가 그 점퍼를 입고 온 것을 볼 때마다 본인이 사준 것이라며 주변에 자랑했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팔이 짧아 여러모로 신경 쓰이고 불편한 옷이었다.

얼마 뒤 한국에서 휴가 때 나를 만나러 놀러 온 친한 친구가 날씨를 고려하지 못해 두꺼운 옷이 없었던 차에 한국 가서도 입으라고 공항까지 입혀서 보냈었다.




그는 쉽게 사람을 믿지 않고 마음을 보여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직원들에게 업무처리에 대한 기준도 높았고 까다로웠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 높은 본인의 기준점(Hurdle)을 넘은 사람들에게는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전적으로 믿고 맡긴다는 평판을 직접 들었던 적도 있고 실제로 겪기도 했다.

그가 프로젝트 초기부터 함께 해외생활을 시작하여 많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X선배에게는 굉장히 관대하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와 나의 관계에도 큰 변화의 계기가 하나 생겼다.

당시 그룹사에서 현지업체를 관할에 두고 프로젝트의 중요한 부분을 수주하여 진행하고 있었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할 무렵, 업체들은 부품 보관을 위한 창고 비용이 발생함을 요구하며 계약금액의 추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다른 한국인 전문직원과도 상의해 봤을 때 업체들이 말하는 것만큼 보관공간이 필요한 품목도 아니었다.

오히려 공정 관리만 잘한다면 우리가 직접 보유하고 있는 시설 내에서도 보관하며 쓸 수 있는 품목들이었다.

본인들이 공정 관리 등 책임을 회피하면서 비용도 보전하기 위해 떠 넘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고 보관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그에게 여러 차례 강하게 피력했다.

그 또한 계속 필요성을 의심했지만 결국 나보다 프로젝트를 함께한 기간이 훨씬 더 길었던 그룹사 책임자의 말에 손을 들어줬다.

나도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지고 돌아봤을 때, 그도 몰랐던 것이 아니고 본인도 책임을 피하기 쉽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에서 갈등하던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른 외부 업체도 아닌 그룹사의 요청에 의해 아주 크지 않은 범위 내에서라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보관 비용은 추가되었지만, 직후 다른 건들로도 그룹사 책임자의 관리 능력에 대한 불신이 쌓이면서 그는 내게 창고 문제의 진위여부를 파보자고 제안했다.

나와 그는 우리 회사 관할의 현지 직원들 둘만 데리고 마치 특수수사대처럼 외곽의 창고 부지를 급습했다.

용의 주도한 그는 도착 직전에 책임자에게 연락해 창고 개방을 요청했고, 거대한 창고가 개방되기 전까지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창고 앞 현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내 창고의 큰 문이 열리고 들어섰을 때 옆에 나란히 서있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 그.

헛웃음을 짓던 그의 표정이 선명히 떠오른다.


아니나 다를까 창고는 우리 품목이 아닌 다른 제품들로 상당수 채워져 있었다.

광활한 창고 맨 안쪽 구석 일부에 우리 품목이 있긴 했다.

비유하자면 전체 신체에서 새끼발가락 정도 차지하는 공간이었다.

창고 안에서 어색하게 계속 웃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후 그가 나를 예전보다 훨씬 더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사무실에서 가까운 한식당에서 둘이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데려갔다.

술잔을 채워주며 프로젝트의 일정 부분을 믿고 맡긴다며 이렇게 해보는 것도 회사 내에서 기회니 잘해보라고 말해주던 그의 모습도 생각난다.

[포돌이 '잡았다 요놈']




이후 파견 생활을 마치고 나는 먼저 복귀하여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해당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해당 프로젝트 경험은 그가 한국에 돌아와 임원으로 진급하고 요직을 맡는데도 큰 족적이 되었다.

그 스스로도 실적뿐만 아니라 회사생활을 계속하는데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물론 해당 프로젝트에서 있었던 일들을 영웅담처럼 신물 나게 이야기한다는 그의 소속 직원들의 얘기 또한 전해 듣곤 했다.

그는 해당 프로젝트에서 함께 일한 직원들을 휘하의 직책자로 중용하고 진급 등에서 챙겨주기도 했다.

나에게도 함께 일해보자는 제의를 두었지만 하고 싶었던 직무를 맡게 된 지 얼마 안 된 때라 고사했다.

물론 그와 다시 합을 맞추는 게 쉽지 않지 않을 것이라는 당시 본능적 회피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그와 가까운 듯 멀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올해부터 그와 다시 업무를 하게 된 것이다.

같은 조직 내 부서장들은 그를 어려워하고 그의 행동이나 화법에 적응하지 못해 많이 당황스러워했지만,

오히려 나는 그가 다른 임원들보다 훨씬 편했다.

그의 성향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사전학습이 되어 있었고 쌓아온 유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점심 식사 후 가끔씩 나와 따로 산책을 하며 본인이 최근 유익하게 본 경영 도서들의 추천과 함께 조직 생활에서 체득한 경험을 녹여 전해주었다.

인생에 길게 남을 조언을 전해주는 그가 참으로 고마웠고 그도 짧았던 점퍼를 줬던 예전의 그보다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계속 강조하는 조직 운영철학이자 두 가지 핵심적 가치는 신뢰와 배려다.

같은 마음으로 진실된 의사소통을 하는 신뢰. 

남의 편함을 위해 나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배려.

하나의 조직원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지 않고 한 뜻을 모을 때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했다.

본인도 리더로서 그러한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도록 동기부여가 필요한 경우는 아낌없이 지지해 주고,

사기를 꺾거나 협업을 저해하는 요인들이 있다면 사전에 배제하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본인의 내적 성장과 변화가 체감되자 앞으로 조직에서도 훨씬 더 성장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든다는 솔직한 속내 또한 밝혔다.


최근에 그에게서 들은 말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따로 있다.

'사람들을 최대한 품으라'.

확실한 문제가 있으면 원천 차단하는 것이 맞지만,

이왕 같이 가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가진 역량이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맞다는 취지였다.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고 노력 중인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온 얘기였다.

물론 그 또한 성인군자는 아니기에 그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의심이나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의 진의를 더 크게 본다.

그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중이며,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회사 생활 또한 매 순간 쉽지 않은 번뇌(苦)의 연속이다.

하지만 속세에서도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과 같이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성장해 나간다면 최소한 그 주변이라도 더 나은 삶을 이끄는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의 구도와 정진을 다시 한번 응원하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소중한 가르침들을 믿고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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