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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PAPA Aug 05. 2023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

B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ärker.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과거의 힘들었던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히 때로는 미화되기도 한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가면 또 어떻게 기억이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을 기점으로 지난 10년의 회사 생활을 돌이켜볼 때, 좋은 추억보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먼저 불러일으키는 시기들이 있다.

첫 번째로 개선을 위한 노력 중이나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작년 말부터 현재의 상황.

두 번째는 입사 1년 차. 기대와 다른 회사라는 조직 문화에 적응을 해야만 했던 때.

마지막으로 단연코 회사생활의 최악의 시기라 꼽을 수 있는 B와 같은 부서에서 업무를 했을 때.


물론 각 시기마다 버틸 수 있었던 건 주변에 좋은 동료, 선후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다.

반대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들 또한 결국에는 사람에 의한 문제에서 비롯다.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B는 여전히 내게 회사생활 최초의 멘토이자 동시에 최대의 빌런(Villain)으로 남아 있다.




내가 입사할 시점에 막 대리로 진급했던 그는 교육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우리 기수의 입문교육 담당자는 다른 선배였지만 비공식적 과정에서는 사실상 그가 주(酒) 담당자였다.

입문교육 중간중간 신입사원들의 정서관리와 이탈방지를 위해 인사 및 교육팀원들과 가벼운 면담 형태의 식사자리들이 있었다.

특히 술이 빠질 수 없는 저녁 식사의 경우 그는 꼭 동행을 했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신입사원일 때 많은 시간을 가까이 보내게 되는 교육 담당자이자 선배인 만큼 우리 동기들과 그는 빠르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술자리는 사양하지 않고 참석하던 20대 후반의 총각 시절.

교육 종료 후에도 그가 호출하는 모임에 자주 함께하면서 입사동기 중에서 그가 총애하는 소수에 포함되었다.

인간관계와 회사생활의 적응이 중요했던 치기 가득한 신입시절. 

러한 만남들 무언가 독보적인 인정을 받은 것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위기의 전조였을까.

그와 어울리면서 뭔가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위화감들을 초기부터 느끼기는 했다.

지금은 다른 회사로 떠난 내 동기 하나가 당시 교육팀에 배치되었고, 그의 아래에서 근무를 시작했었다.

업무 시작 직후부터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동기가 없는 술자리에서 그는 꼭 동기의 문제점들을 얘기하고는 했다.

예를 들면 아주 긴급히 처리해야 하는 업무의 일환으로 중요도는 낮지만 품이 많이 드는 잡무들을 주말에 맡겼는데 완성도도 낮고 불만도 많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기가 전하는 하소연은 그의 표현과 정반대였다.

그는 다른 부서원들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아 예전부터 부서 내에서 보통 혼자 진행하는 업무들을 맡았었다고 했다. 

그 와중에 그에게 독자적으로 맡겨져 있던 업무를 방치하고 있다가 문제가 대두되었고, 수습을 위해 주말 직전 막내인 본인에게 방대한 업무를 지시했다는 얘기였다.


"너는 앞으로 회사생활 할 때 그렇게 하면 안 돼."

"내가 너 생각해서 말해주는 거야."


동기에 대한 비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필요한 공격성 발언에 묘하게 이질감을 느끼긴 하면서도, 그의 말들을 나만을 위한 진솔하고 애정 어린 조언이라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그 화살 결국에는 나에게도 향할 수 있다고는 미처 깨닫지 못한 채.

[화가&배우 박기웅 님의 '48 ViLLAINS'展, 올해 초 우연히 보게 된 매력적인 전시회]


그는 인사, 노무, 교육 담당자들과 제도 개선을 위한 TFT활동을 했던 이력 등을 바탕으로 몇 해 후 교육팀에서 인사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내가 잠시 해외에서 프로젝트 근무를 마치고 복귀했을 때 인사팀에서 함께 일해보자며 추천과 제안을 해준 것도 그였다.

기존 소속부서에서 다른 업무들을 해보며 재정비와 조금 쉬어가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고사했지만,

나의 의사는 큰 의미가 없었고 절대로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면 한번 해보라는 사실상의 통보를 받고 부서를 옮기게 되었다.


그와의 업무를 시작하고 나서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예전 그와 함께 일했던 내 입사 동기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급히 다른 부서들에서 인원들을 차출해야 했을 만큼 그의 아래 직급에 이탈이 많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실무 역량보다는 임원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술에 취해본 적이 손에 꼽는다고 자부할 만큼 뛰어난 주량에 더욱 장점이 있었다.

회사 일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의 지시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관계적, 정치적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 당시에도 이해 못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부서원들이 계속해서 야근을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일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그 담당 임원과의 유대와 본인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후배들도 바로 눈치챌 정도였다.

참다못해 한 번은 나서서 그에게 조용히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일과 후 윗분들과의 대면 자리가 많으시니 당장에 불필요한 업무는 쳐낼 수 있게 분위기를 봐서 좋은 방향으로 얘기를 꺼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돌아온 대답은 '내가 그걸 어떻게 얘기하겠냐?'라는 핀잔이었다.


대표적인 일화만 이야기했지만 이미 그와의 관계는 수많은 갈등 속에 서서히 틀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 또한 표정관리가 안되기 시작했을 것이고, 팀원들을 위해 줄 것이 아니면 최소한 더 이상의 불합리한 요구는 하지 마시라는 불만을 대놓고 표출하기도 했다.

스스로 당시를 변호를 하자면 야근 후 새벽에서야 비로소 아내 혼자 잠들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이렇게 회사생활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서럽게 울어본 적도 있을 만큼 괴로운 시절이었다.  

그러다 회사에서는 더 이상의 감정 소모 없이 필요한 일만 빠르게 해결하겠다는 확고한 다짐을 하고 난 몇 달 뒤 그와의 관계가 완전히 멀어지게 된 일이 생겼다.


그가 후배들을 불러 모은 저녁 자리에서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는 이야기를 한 후배로부터 전해 듣게 되었다.

내게 그 이야기를 전해 준 후배의 행동도 돌아보면 바람직하다고만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후배 또한 나보다도 훨씬 그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던 상황이었다.

그는 그를 제외한 다른 부서원들이 본인에게 비우호적인 상황을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본인과의 어울림을 멀리하기 시작한 내게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Pixabay


나는 어떤 후폭풍을 감수하고서라도 그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기로 결심했고, 당시 새로 온 부서장에게도 만 2년 근무를 채운 후 다른 부서로의 재이동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딸아이의 육아시작에 따른 고충과 경력관리 차원이었으나 부서장도 그와의 갈등이 제일 큰 문제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형편없지만 몇 년 전내가 지금만큼이라도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가 보내는 자극에 굳이 맞불을 놓지 않고 조금 더 유연하게 흘려보내며 원만히 대처했을 수 있었을 것 같긴 하다.


그가 가진 문제에 대해서 윗선에서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만들어오는 그의 추진력이나 윗선에서 원하는 대로 잘 반응해 주는 그의 모습들이 조직에서는 오히려 높게 평가받을 중요한 요소였을도 모른다.

하지만 한 사람을 오래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짧게 속일 수는 있지만 여러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는 말처럼 조직 내 관계 측면에서도 한계 서서히 드러났다.

다른 지점으로 이동 후 최근 몇 년 간 회사 내외부에서 좋지 않은 평판과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얘기들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올해 초.

나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던 A로부터 그가 약간의 업무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은 차원에서 함께하기로 한 점심 식사자리에 한 사람 정도 더 부르는 얘기가 A 나에게 함께 식사를 가자 요청을 다.

오랜 시간 동안 그도 많이 힘들었을 테 이제는 원망도 많이 희석되었다고 생각해 같이 가자는 제안에 승낙을 했다.


하지만 역시나 후식 자리에서 굳이 그 자리의 사람무관한 다른 선배에 대한 공격성 발언을 들으며 그에 대한 일말의 고마움과 연민이 무의미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뭔가 내가 그의 말들로 상처받을 이유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그를 생각할 때마다 감정을 소모하던 스스로도 자유로워지는 그런 기분이 들다.




다시 또 그와 함께 업무 이외의 자리를 함께할 시간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회사에서의 관계가 돌고 도는 것은 분명하고 그와 또 지근거리에서 업무적으로라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만에 하나 정말 그리 된다면 초연한 마음으로 웃으며 그를 대할 수 있는 가 되길 바란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조직 생활에 대한 강력한 예방주사를 놔준 셈이었다. 회사 생활의 스트레스에 대한 임계치를 확실히 높여주었으니 말이다.

이미 그 덕분에 행한 수많은 마음의 담금질 속에  예전보다 조금은 나의 세계도 넓고 강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도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또 다른 삶의 고통들로부터,
무뎌지지는 말고 조금 더 의연해져 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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