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에 물든 가을(2)

by 나디아

다음날 나와 은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젯밤 늦게 들어와 맨바닥에 요가 매트 하나를 깔고 자서 그런지 온몸이 얻어맞은 듯 배겼다. 찌뿌둥한 몸을 간신히 세우고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토론토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이다. 피곤한 몸으로 본 어제의 토론토와는 사뭇 달랐다. 그날은 인생에서 가장 화창했다고 말할 만큼 날씨가 좋았다. 그동안 꿈꾸던 가을 여행, 그 첫 발을 비로소 내디뎠다.


우리는 올드 토론토 시내를 걸었다. 구 시청이 눈에 들어왔다. 단장을 새로 마친 신축 시청과 구 시청이 한 곳에 자리하는 게 신기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건물도 세대를 아울러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아무 준비도 없이 그저 나를 따라온 핸드폰은 캐나다에서는 먹통이었으므로 모든 길은 은이가 찾았다. 일일 가이드를 옆에 두고 나는 편안하게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나의 시선을 빼앗아 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이 바랜 오랜 건물들이 그게 본래의 색인 듯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세월이라는 물감으로 새롭게 도색한 것 같았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바랜 회색, 옅은 버건디, 베이지 색이었는데, 꼭 가을 단풍잎 같았다. 서서히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토론토에 스며들어갔다.

길을 걸으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횡단보도 앞 신호를 기다리면서 나는 좋다는 말만 수없이 반복했다.

나도 한 달 전엔 딱 그랬었는데 이젠 너무 익숙해졌어. 근데 네가 좋다고 하니까 다시 보인다.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연신 감탄하고 있는 내게 은이가 말했다.

은이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나도 그랬다. 미국에 와 적응하는 동안 설렘은 차츰 익숙함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어느 노래 가삿말이 떠오른다. 토론토 거리를 활보하면서 여행자만이 가진 특권에 대해 생각했다. 여행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여행하는 것과 타지에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것을 미국에 와 지내면서 느꼈다. 여행자로 삶을 살아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저만치 앞서간 은이가 고개를 돌려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익숙함에 속아 지금 눈앞에 펼쳐진 한 때(Prime)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나는 걸었다.


우리는 CN 타워 전망대에 갔다. 밑에서 올려다본 타워의 크기에 감탄하면서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보이는 스카이론타워를 CN 타워라고 굳게 믿었던 때가 떠올라 웃었다.


전망대에서 토론토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뉴욕의 전망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나는 밤보다 낮에 전망을 보는 걸 좋아한다. 그래야 건물 하나하나를 제대로 눈에 넣을 수 있다. 대부분의 전망대는 고층 건물밖에 안 보여서 계속 보다 보면 답답한 느낌이 든다. 토론토는 바로 뒤에 온타리오 호수가 펼쳐져 있어 신선한 공기가 들어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인공눈물을 넣어 촉촉해진 눈으로 세상을 보는 느낌이었다.

수평선을 쳐다보면 저 끝이 어딜까 한평생 닿을 순 있을까 싶다. <청춘의 독서> 머리말이 떠오른다.


"세상은 죽을 때까도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며, 삶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것을.., 인생에는 가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고 있으니 언젠가 루이스턴에서 바라본 호수가 생각났다. 그날 나는 호수에 피어난 윤슬을 보며 꼭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같다고 생각했다. 바로 메모장을 열어 적기 시작한 내용은 이러하다.


땅 위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세 개의 하늘을 품는다. 청록색 물이 햇빛을 받아 하늘색을 띤다. 하늘에 있어 역설적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는 태양은 바다를 자신의 하늘로 만든다. 물 위에서 반짝이는 윤슬은 태양이 심어놓은 구름이다. 물에 닿은 햇빛은 나무가 그늘을 내어주듯 따사로운 여름빛을 쏟아낸다. 강가에서 진화한 우리는 물을 보면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고 한다. 벤치에 앉아 태양이 수놓은 햇빛, 물 위에 피어오른 구름을 바라보며 나만의 하늘을 품는다. 땅 위에 사는 인간은 세 개의 하늘을 품고 살아간다. 귓가를 스치는 새의 지저귐, 햇빛과 바람에 일렁이는 물, 그리고 여름을 준비하는 나무 그늘 밑에서 나의 여름을 쓴다.


타워에서 내려다본 온타리오 호수가 너무 아름다워서 이 장면을 잊고 싶지 않아서 내려오는 순간까지 눈에 하나라도 더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나는 CN 타워 배지를 샀다. 여행지에서 배지를 모으게 된 것은 아마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토론토에 온 가장 확실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딘가로 향했다. 슬슬 배고프다는 신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좋은 때였다. 바로 마라탕이다. 한국을 떠나온 지 한 달이 되는 동안 마라탕을 한동안 먹지 못했다. 토론토에서 지내는 은이는 별로 어렵지 않게 마라탕을 구할 수 있었으나 내가 사는 나이아가라에서 한식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식 마라탕은 구경조차 하지 못한다.


마라탕을 먹기 위해 나는 국경을 넘은 것이다. 참 웃픈 현실이다. 원하는 재료를 골라 담고 계산을 하러 카운터에 갔다.

몇 단계요?

직원 분이 내게 물었다.

아 맞다 2단계요.

한국에서 2단계를 먹으니 자연스럽게 2단계라 대답한 것이다.

음식을 받자마자 나는 이 선택을 후회했다. 빨간 국물이 아닌 허여멀건한 국물에 마라 기름이 조금 섞인 비주얼이었다. 맛은 있었으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매움을 원했던 내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말이지 너무 아쉬웠다. 이때만 해도 마라탕을 위해 국경 한 번 더 넘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토론토는 오려면 언제든지 또 올 수 있고 앞으로 몇 댓 번은 더 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일일가이드는 나를 정말 많은 곳으로 데려갔다. 하루에 토론토를 다 봤다고 할 정도로 버스를 타고 걷고 또 걸으며 그렇게 한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에 걸음수를 확인했더니 32,104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리틀 이태리에 있는 한 서점에 우연히 들르게 되었다. 서점만 오면 나는 읽었거나 배운 서적을 찾느라 눈 굴리기 바쁘다. 그렇게 한참 서서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원서를 구경하는데 익숙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로렌스의 책이다. 로렌스는 내가 아무것도 몰랐던 대학 1학년 수업 시간에 배운 영국 작가이다. 책장을 넘기며 그때 배운 소설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기억의 순간들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떤 한 학문을 전공하는 건 정말이지 위대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감흥 없이 지나가는 것을 정말 또렷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학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만큼 풍부한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인문학이 위대한 이유는 생명력이 없는 것들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예술이나 문학은 살아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 들어와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듯한 느낌을 준다. 로렌스의 책을 넘기는 동안에 내 안에 있던 인문학적 감성이 다시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와 은이는 서점에서 나와 켄싱턴 마켓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기사님이 차표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내게 건넸다. 영수증 비슷한 것이었다. 그냥 버리기 아까워 주머니에 꼬깃꼬깃 집어넣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심히 버렸을 영수증이 새로움이란 포장지에 싸여 나만의 기념품이 된다. 한시적인 기념품이 미래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선물할지 궁금했다.


켄싱턴 마켓을 구경하면서 지나가다 달달한 와플 냄새에 이끌렸다. 우연히 들어오게 된 와플 가게에서는 메이플 시럽을 뿌린 벨기에식 와플을 팔고 있었다. 밥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배고프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약속한 듯이 와플 하나를 시켜 나눠 먹었다. 그러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어느덧 깜깜한 밤이 되었다. 짧아진 낮의 길이를 체감하며 가을이 왔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동안 구경조차 못한 한식을 정말 오랜만에 먹었다. 맛있었다. 나도 이곳에서 한식 사업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배가 불렀으나 음식을 먹은 후에는 꼭 무언가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버블티 가게에서 밀크티를 하나 샀다. 너무 맛있었다. 펄의 식감이며 밀크티의 당도까지 별 기대 없이 마신 밀크티가 세상 맛있었다. 우연은 가끔 기막힌 행운을 가져오는구나 생각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우연이라고 해서 행운마저 꼭 우연적이지는 않다고, 필연적인 행운을 동반할 때도 있는 거라고 누군가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케이팝 나이트 티켓이 생겼는데 같이 갈래?

토론토에 막 도착한 어젯밤 은이가 내게 물었다.

오 당근 가야지

내가 대답했다.

미국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학교에서 열리는 파티를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노래를 몰라서 흥얼거리지도 온전히 심취하지도 못했다. 수박 겉핥기처럼 발만 살짝 담그고 온 게 못내 아쉬웠는데 케이팝이라니 이건 무조건 가야 했다. 사람이 별로 없을 거란 내 예상과는 다르게 정말 많았다. 그것도 외국인이. 앞에서 디제이가 믹싱을 하면 사람들은 떼창을 한다. 그 광경이 놀라웠다. 내 옆에서 취한 듯 눈이 반쯤 풀린 채 춤을 추던 여자애는 노래가 나오면 나보다도 먼저 따라 불렀다. 심지어 나는 모르고 그 애는 아는 노래도 있었다.


취한 그 애를 찾으러 다른 친구가 오고 우리는 사진을 찍고 인스타를 교환했다. 서로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도 모른 채 우리는 함께 춤을 추고 사진을 찍고 맞팔을 했다. '세상에 이런 만남도 있구나.'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속도였지만, 누군가를 알아가는데 꼭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 긴 시간을 함께했어도 그 사람을 다 알지 못하니까.


숙소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토론토의 밤을 눈에 담았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토론토의 야경이었다.

도시의 밤은 화려하다. 밤을 더 찬란하게 하기 위해 공들인 낮의 시간을 기억하자.

내가 속으로 낮게 읊조리는 동안 택시는 빠르게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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