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안 좋은 습관을 발견했다.
타인이 말을 하기도 전에 그 사람의 말을 예측해서 답변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예측 출발이란?
보행자나 자동차가 신호등 변경 전에 미리 출발하는 행위를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집 근처나 동네에서 자주 범하는 습관이자 실수일 것이다.
나 또한 집 앞 횡단보도에서는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이고 말곤 하니까.
그러나 언어에도 이런 것이 있을 줄 몰랐다.
나는 쉽게 다른 사람들의 말이 예상이 된다.
드라마를 보다가도 주인공이 "우리..."라는 대사를 치면
내 입에선 조그맣게 "헤어지자."라는 말이 새어나온다.
그럼 길게는 3초 안에 주인공의 입에서 같은 말이 나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름 흡족한 미소를 지었었다.
역시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어, 그럼 그렇지와 같은 일종의 자아도취이거나
드라마를 얼마나 많이 봤는데 이 정도 클리셰는 눈치채야지. 같은 허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상에서도 이 습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얼마 전 회사에서 상사가 내 자리로 다가오더니 "어,"하고 뭔가 발견한 듯한 말을 뱉었다.
나는 급하게 앞에 있던 노트를 가렸다.
노트에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필체로 잔뜩 휘갈겨 쓴 메모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다.
학생 때부터 으레 이런 상황에 수많은 상대들은 "너 진짜 악필이구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 이건 지금 클리셰야. 그렇다면 내가 쳐야할 대사는.
"하하, 이거 그냥 저만 알아보게 쓴 거예요."
"여운씨 메모하는 습관이 있구나. 그거 진짜 좋은 거예요."
두 말이 동시에 출발해 부딪혔다.
도로 위였다면 이건 필시 사고다.
오디오가 물리는 바람에 서로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고 상사가 먼저 친절하게
"메모하는 거, 정말 좋은 습관"이라며 나를 칭찬해주고는 자리를 떠나셨다.
분명 좋은 습관이 있다는 칭찬을 받은 것인데
동시에 안 좋은 습관이 있다는 것을 혼자서 깨달아버린 것 같아 머리가 띵- 울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에서 오전의 상황을 곱씹어봤다.
그렇네. 일상은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상황을 예측할 수가 없다.
아니, 세상의 모든 상황이 예측될 리가 없다.
어김없이 마주한 집 앞 횡단보도.
여느 때처럼 예측 출발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마치 이 동네가 처음이라 익숙하지 않다는 양-
초록불로 바뀜과 동시에 출발했다.
요즘에는 예측이 될 것 같더라도, 이 사람이 할 말에 내가 먼저 대답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거릴지라도, 아직 내 신호는 빨간불이기 때문에 꾹 참고 기다린다.
내가 들어보지 못한 어떤 새로운 말이 나올까하고.
상대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것은 십수년 간 들어온 예상 범위에 있는 말일 때도 있고
그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신선한 말일 때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날 향한 순간, 내 신호에 초록불이 켜지면 입을 뗀다.
예측 출발할 때보다 한껏 여유로워진 언어의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