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을 위한 첫걸음 : 반려동물
어린 고양이의 생존 : 힘없는 어린 생명이 보이기 시작한 날
비가 추적추적 내려 뿌연 습기가 차고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시골길. 자동차 안개등에 의지해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고 있는데 흰색 무언가가 열심히 달리며 내쪽으로 오고 있었다. 차량 빛에 의지해 나에게로 달려오던 물체는 고작해야 5개월령으로 보이는 작은 고양이였다. 그 작고 어린 고양이는 이제 막 독립한 것으로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형제도, 어미도 없이 그리 혼자 다니지 않으니 말이다. 작은 몸집에, 어둠과 대비되는 흰색 털이 어찌나 열심히 달려오던지. 그 모습이 너무나 연약해 보여, 어찌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그 모습에 나는 고양이가 안 보일 때까지 고양이의 발자취를 눈으로 좇았다. 진중한 응원을 보내면서 말이다. 너의 삶이 오늘의 날씨 같지 않기를 바라며, 항상 따스하고 풍요롭기를 바라며...
이때부터였다. 길고양이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한 날이 말이다. 추운 날 막 독립한 새끼 고양이에게 넉넉한 사료를 부어주지 못한 죄책감 때문인가. 그 죄책감으로 고양이 사료와 간식을 챙겨 다니기 시작했다. 우선 사료를 들고 회사로 갔다. 깨끗한 그릇 두 개를 꺼내 들고 한 개에는 사료를, 나머지는 물을 담았다. 어디에 둘까 고민하며 그릇을 들고 돌아다녔다. 그때 회사 직원이 그릇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고양이에게 먹일 밥과 물이라고 설명하며 자랑스럽게 그릇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음에 들려오는 말. "에이, 주지 마. 사냥해서 다 먹고살아. 안 그래도 비닐 다 뜯어놔서 다시 비닐로 싸야 돼." 고양이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큰 소리가 난 터라 시간을 갖고 해결해 보기로 했다.
두 번째는 내가 거주하던 아파트 단지였다. 길고양이 먹이 급여에 관련해서는 찬성과 반대 입장이 극렬하게 나뉘기 때문에 아파트는 더 조심스러웠다. 이번에는 종이컵 두 개에 물과 사료를 가득 들고나갔다. 마침 편의점 앞에 고양이도 보였다. 그런데 편의점 앞 벤치에 웬 아저씨가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발걸음이 짧아지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동네 고양이를 챙겨주는 것에 익숙 않았을뿐더러 인터넷에서는 고양이를 챙겨주는 사람들을 혐오하며 모욕까지 해대고 있으니 말이다. 한 10초간 멍하니 서있다, 오히려 당당하고 용감하게 "야옹아 기다렸지? 밥 먹자!"를 외치며 초면인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아저씨는 그런 날 보더니 "고양이 좋아하나 봐? 난 싫어. 만지는 것도 싫고, 보는 것도 싫어."라고 말했다. 나는 아저씨의 말에 "싫어할 수 있죠. 고양이한테 해만 안 끼치면 싫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저씨 고양이 때리실 거예요?"라고 물었다. 아저씨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더니 좋은 일 한다며 검정 봉투에서 캔음료를 꺼내어 내게 주고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 다 고양이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나 다르다. 왜 그런 걸까? 회사 직원은 '고양이'에게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미 이 영역에서 살던 고양이이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사냥해서 먹으니 굳이 먹이를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아파트 주민은 '밥을 주는 행위'에 초점을 맞췄다. 동네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행위는 단순히 밥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도움(마음)을 주는 행위인 것이다. 이 마음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고양이를 싫어하지만 밥 주는 행위를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고양이를 생명체로 존중한다는 것이다. 공존의 방식은 이토록 다양하다. 이 정답 없는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자'라는 마음이 답이 될 수 있도록 뜻깊은 여정이 될 수 있게 해 준 그 작은 아이를 추억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