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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초하 Sep 27. 2022

4부작/일주일 전 3

나는 남편을 잘 모르겠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 나는 왠지 예민해진다.

특히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괜히 우울해져서 세상일이 무기력해 지곤 한다. 그럼에도! 내가 무기력해도! 나는 늘 할 일이 있다.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학원에 보내고 밥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운다.

이 중 하나라도 소홀하면 아이들은 티가 난다. 주부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고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늘 사랑이 뭔지 모르는 나에게 이 일은 많이 버겁기만 했다. 아이를 더 원한 것도 남편이었는데 아이를 돌보는 건 내 몫인 것이 늘 불만인 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억지로나마 받아들였고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 익숙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늘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신경 써줄 것을 요구했다.


남편은 부모의 애정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고 말했다. 엄마도 아빠도 늘 무뚝뚝했고 화를 냈고 불친절했다고. 엄마도 아빠도 없이 자란 나는 부모님이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남편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았다고 말했었다. 내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외로웠기 때문에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라고.' 말했을 때 남편은 본인은 본인의 부모와 달리 좋은 부모가 되겠노라 내게 말했었기에 나는 엄마가 될 마음을 먹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통념의 너무나 확고했다. 좋은 아빠는 회사에 다녀서 경제력을 도우면 되는 거였다, 더불어 주말에 누워있지 않고 아이와 나간다. 이것을 더하면 세상 다정한 아빠로 통했다. 그런데 엄마는 달랐다. 일을 안 하고 아이를 키우면 무능력한 기생충, 일을 하면 아이를 방치하는 엄마 그 두 가지였다. 세상은 많이 변했어도 육아는 여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아이가 싫은 게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중간 언저리를 맴도는 엄마라는 자리가 힘겨웠으나 시간이 갈수록 남편은 이해해주지 않았다. 본인은 늘 좋은 아빠였고 나는 늘 모자란 엄마였다. 나는 지쳐갔으나 지칠 수 도 없었다.


 정말이지 아이를 원한 건 남편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결혼과 임신이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남편은 한 번도 피임을 하지 않았다. 나는 피임을 몰랐다. 그렇게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남편은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했고, 나는 세상을 잃은 것처럼 불안했다. 남편은 나의 불안을 알지 못했다. 내가 감춰서가 아니라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나의 불안을 늘 이야기했지만 남편은 흘려들었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사랑스러웠고 모성은 생겨났다. 다만 내 안에 쌓인 무언가는 더욱 진해졌다. 울다가도 웃게 되고 웃다가도 울게 되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남편은 아이를 더 이상 아이로 보지 않았다. 친절한 설명보다는 질책을 많이 했다. 너보다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건 나를 사랑한다는 게 아니라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현이었다. 나는 그게 견디기 어려웠다.

결핍을 가지고 시작한 부부가 우리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게 사랑밖에 없을 을 합의해 놓고 아이가 자라면서 본인의 의사와 다른 어떤 행동을 하면 그것을 가르치고 교정하려는 게 아닌 단순한 화풀이가 되어가는 게 싫었다. 몇 번이고 이야기하고 알려 줘도 남편은 남편의 생각데로 행동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은 당연히 부모의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하는데 그걸 남편은 견디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아무 문제없는 아이를 남편은 문제아처럼 대했고, 무시했다. 표현이 원래 서툰 남편이라 당연히 칭찬도 인색했다.

그리고 지난주 남편이 아들에게 갑자기 화를 낸 것이다.


부부니까, 남편이 우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서 많은 부분을 남편의 편이 되어주지만 이번은 달랐다. 누가 봐도 남편이 잘못했다. 남편도 사람이고 아빠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과하지 않는 태도가 아이를 몰아붙이는 그 태도가 나는 너무나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늘 목소리만 크지 지는 인생을 살면서도, 내 자식은 사랑받으며 자라길 바라기에 내가 이상하다고 나를 몰아붙이면서 가정을 유지하는 이유를 남편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남편이 아이에게 화를 내고 얼어붙은 식탁의 공기를 풀고자 남편에게 왜 그랬는지 물었을 때, 남편은 오직 아들이 잘못했다고 했다 나는 부모도 사람이라 실수할 수도 있도 잘못된 화풀이를 할 수 있다, 잘못이 있으면 가르쳐 주는 것이 부모임으로 잘못된 부분은 가르치고 사과할 건 사과하기를 말했지만 남편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서로 말하지 않고 사는 중이다. 잘 모르겠다. 남편을.

그렇지만, 부모도 아이에게 실수할 수 있고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게 되는 아빠라고 믿고 나는 남편과 살고 있는 것인데,  나는 잘 못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남편이 본인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아들에게 사과하길 바라지만, 그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럼 우리가 과연 함께일 수 있을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소설 같은 이야기, 알 수 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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