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엄마 언제 건강검진 한 번 받으러 와라~"
병원에서 일한지 10여 년이 지났던 어느 날.
당시 건강검진센터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지방에 계신 엄마랑 통화하다가 무심코 말했다.
"아이고 거기까기 가서 힘빠져서 언제하노~ 여기서 할란다~"
"으구~ 그래도 딸래미가 검사결과 봐주면 좋지~ 그래 검진은 좀 받고 있나?"
"유방검사랑 내시경 그런거 다 한다~"
"유방검사 머? 초음파도 하나?"
"아니 엑스레이만 찍는데 초음파 그 비싼거 할 필요 있나~"
"그래도 함 해보지. 만져지는 거 없나 한번 봐봐라~"
그렇게 늘 전화로만 안부를 건네던 무심한 딸이었다.
며칠 후 엄마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콩알만한게 머 만져진다.. "
악성이었다.
엄마는 결과를 듣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나는 무조건 당장 올라오라고 말했다.
그날로 부랴부랴 짐을 싸서 오빠차를 타고 우리 집에 올라온 엄마.
새벽에 그렇게 마주한 엄마와 나 오빠 새언니 그리고 엄마의 강아지 다복이까지.
우리 모두 약간 넋이 나가 있었다.
엄마와의 동거가 그렇게 시작됐다.
엄마는 다행히 수술을 잘 견뎌주었다.
하지만 나는 수술 후 엄마의 휑하진 가슴과 길게 남은 흉터가 맘이 아팠다.
항암을 시작하는 날 바리깡을 사서 머리를 밀어주며 괜한 농담을 던졌지만 엄마가 울까봐 무서웠다.
내 마음을 아는건지 단 한번도 내 앞에서 약해지지 않는 엄마였다.
힘든 몸을 일으켜 어떻게든 한 시간씩 걸으러 나갔고
까끌까끌한 입속에 죽이라도 한술 집어넣으려고 애썼다.
엄마는 엄마를 지키는 게 나를 지키는 거라 오빠를 지키는 거라 생각했던 거 같다.
엄마는 아파도 엄마였던 거다.
하지만 나 역시 엄마가 아파도 그저 자식새끼였다.
항암이 끝나며 엄마의 머리가 다시 자라 빗질을 시작하게 될 무렵
나는 본색을 드러내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 이거 왜 여기뒀노 내꺼 건드리지 마라~
아 피곤하다 잘란다
밥 먹기 싫은데 왜 했노~
결국 엄마는 항암이 다 끝나고 다시 엄마의 집으로 돌아갔다.
내 집이 편하다~ 라며.
그렇게 엄마가 가 버린지 얼마 안돼서
내가 담당하던 검사실이 유방검사실로 바꼈다.
수많은 환자들을 보며 자꾸만 엄마 생각이 났다.
그 때 나는 왜 그렇게밖에 못했을까..
으그~ 이 놈의 자식새끼..
그래..나는 그놈의 자식새끼다..
엄마에게 해주지 못했던 친절을
이 사람들에게라도 해주자고 마음먹었다.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진심을 건내기 시작했다.
아프죠 그래도 조금만 더 해봐요 우리~
그렇죠 너무 좋아요
검사 끝났어요
진짜 잘 참으셨어요
고생하셨어요
이 말들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에서 베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그들 역시 나에게 마음을 나눠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게 따뜻한 응원을 해주고
고생한다며 토닥토닥 안아주기도 했다.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어떤 날은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따뜻함을 그렇게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누군가에게서 받은 다정한 말,
어떤 글에서 마음을 데운 한 문장이 떠올랐다.
기억해야겠다. 남겨야겠다. 나눠야겠다.
그렇게 나의 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