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에 걸러지는 인간
또 다시 돌아온 추운 겨울의 끝 무렵, 대학을 졸업하고서 빵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포장박스를 미리 접어두거나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하고 계산하는 것이 주된 나의 업무였다. 거기에 아이스크림 기계가 새로 들어와 완벽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만들기라는 업무도 추가되어 나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의 지인으로부터 그분이 다니고 있던 직장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전에도 한번 이력서를 넣어보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지만, 내가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바로 거절했던 일이었다. 아직 학생이었을 때다보니 회사라는 곳이 너무 크게 느껴졌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쫄지 않았다. 짧은 망설임 후 곧바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안 해서 좋은 것보다 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는 후회가 더 클 것 같다면 무조건 ‘한다!’에 거는 편이다. 아무래도 취업에 대한 고민이 계속 있다 보니 살짝 간보기에도 딱인데 안할 이유가 없지. 그럼에도 긴장이 안 되는 것은 아닌지라 스스로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자기 암시를 계속 걸었다.
이력서를 넣고 입사의 통과의례인 건강검진만이 남았을 때였다. 소개해주셨던 분이 내가 뇌전증이 있다는 걸 아셨는데 건강검진을 받을 때 내 병에 관련된 이야기는 일절 하지 말라 신신당부해주셨다. 병이 있다고 썼다가는 바로 떨어진다고 말이다. 사무보조라고는 하나 일 년에 한두 번, 일손이 부족한 시기에만 구하는 단기 아르바이트라 어지간하면 떨어질 가능성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 ‘어지간하다’에 속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병 하나쯤 있다 해도 문제 될 것 없지 않나?’라는 건 지금 생각해도 순진한 생각이었다. 건강검진 중 나는 말해버리고 만 것이다.
“먹고 있는 약이 있기는 한데, 용량도 적고 완치나 다름없어요.”
도대체 왜 그랬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떨어질 뻔 했다. 왜 떨어지지 않았냐면 소개해주셨던 분이 나의 건강검진 결과를 보고 다시 연락 주신 덕분이었다. 아픈 곳일랑 아무데도 없다 말하고 나서야 나는 통과할 수 있었다. 그분은 나중에 다른 곳에 입사 지원할 때도 나았든, 현재진행형이든 병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하는 게 아니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일을 하려면 내 병의 정도에 상관없이 무조건 숨겨야 한다는 것이 못내 서러워 물었다.
“몇 년 동안 발작 한 번 한적 없고 완치에 가까운데, 그래도 안 되는 건가요?”
돌아온 대답은 ‘안 된다.’였다. 일을 하는데 지장이 없다 하더라도 일단 병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 제일 먼저 걸러지는게 취업 시스템이라고 했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먹는 약이 있는지 묻는 물음은 칼을 들이밀고 나를 자를 것인지 말 것인지 묻는 것과 같다. 병, 그게 뭐라고 나를 이렇게 작아지게 만드는지.
병원에서 두 번째 신체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뒤, 침대에 누워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감춰야 한다던 그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그날 밤은 내가 처음 뇌전증을 진단받았던 날과 비슷했다. 잠들기 어려운 밤이었다. 병을 가진 사람을 뽑지 않겠다는 건 기업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일에 지장을 주거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이해해주지 않는 세상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며칠 뒤 사무실로 첫 출근을 했다. 늘 과제용으로만 쓰던 프로그램으로 하는 서류 업무는 걱정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았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려 다니며 마지막까지 무탈한 나날을 보냈다. 평화로운 근무기간은 내게는 일종의 증명과정이었다. 뇌전증이 있어도 평범하게 일할 수 있다고 말이다.
뇌전증 진단 당시에는 아픈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도 믿지 못했던 시간이 있다. 나는 아프니까, 그 말은 스스로 거는 저주였다. 병보다 더 무서운 저주.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증상도 줄어 없어지고, 이전보다 더 건강한 생활을 하며 다시 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비록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던 건 아니지만, 스스로 일인분을 해냈음에 뿌듯해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속 공장장은 노동자들을 기계가 돌아가기 위한 부속품 따위로 생각하고 감시하며 명령을 내린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 그런 모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영화의 도입부에 이런 자막이 나온다. ‘이것은 공업화되어 가는 각박한 사회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라고 말이다. 나는 이미 부속품으로서는 결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나만의 행복을 찾아나가고 싶다. 본연의 나로 행복할 것이다. 계속해서 글을 쓰다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