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과거가 된다
제주 가족여행의 둘째 날이 밝았다. 오전 첫 일정은 용머리 해안, 원래는 사계해변을 가던 길이었는데 우연히 발견한 용머리해안 이정표에 홀린 듯 걸음을 멈췄다. 표지판에 적힌 입장마감 시간은 11시, 현재 시각 10시 반. 우리는 매표소까지 한 걸음에 달려가 입장권을 끊었다.
용머리해안 길을 따라가다 보면 물결모양의 벽이 두루마리를 펼친 듯 이어진다. 벽 아래를 걷다 보면 동굴에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바닥임에도 아이들은 장애물 피하기 하듯 뛰어놀기 바쁘고 어른들은 벽에 붙어 사진 찍기 바쁘다. 웅장한 자연 앞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즐겁다. 울퉁불퉁한 바위에 발이 턱턱 걸릴 때마다 절로 ‘아이고’ 곡소리가 나온다. 그럼에도 자연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오후에는 소품샵에 들러 어머니는 친구분들에게 드릴 마그네틱을 사고, 나는 다양한 디자인의 와펜을 다리미로 지져 키링을 꾸밀 수 있는 곳에서 나만의 키링을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모양 위에 돌하르방 캐릭터와 한라봉, 야자수 나무, 그 위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인 김밥을 넣고 문구는 사심을 가득 담은 '대박'과 '사랑!'을 선택했다. 옆에 있던 어머니에게도 하나 골라 달라 하니 땅콩을 골라주길래 살짝 고민했지만 지금 보니 귀여운 게 넣길 잘한 것 같다. 지금도 이 글을 읽고 있을 어머니에게, 고마워!
아기자기한 것들에 지갑을 털리고 난 뒤 맛있기로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빵을 잔뜩 사며 정신없이 오후를 보내면서도 커피 한 잔 마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장소 이동이 많은 일정에 피로감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저녁은 회를 포장해 숙소에서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냥 포장하지 말고 먹고 갈 것인지부터 시작해 사이드를 추가할 것인지 말 것인지, 왜 카페는 가지 않은 것인지 대화가 과거로 돌아간다. 억지로 시곗바늘을 뒤로 빙빙 돌리기 시작하자 관계도 함께 삐그덕 거린다. 지쳐버렸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 입 뻥긋할 힘도 없다. 쏟아진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가 한 마디를 더하자 기름에 물붓듯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고운 모래가 아름다운 김녕 해변에서 우리는 말을 잃어버렸다. 끊어질 듯 말 듯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듯 말하는 게 다였다. 근처의 유명 횟집에서 모둠회를 포장해 조천에 위치한 숙소로 향했다. 겨울이 다가옴에 추위를 피하듯 해는 재빨리 모습을 감춘다. 그나마 띄엄띄엄 있던 가로등이 종국엔 없어져버리자 어둠이 무섭게 뒤따라온다. 만약 저녁을 먹고 들어왔더라면 찾느라 꽤 애를 먹었을 것이다.
조용한 차 안에도 조금씩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일찍 나서길 잘했네.”
“밥 먹고 왔으면 너무 어두워서 길 찾기도 어려웠겠다.”
길이 왜 이렇게 어두컴컴하냐며 다들 입을 모아 다행이라고 말하기 바빴다. 마치 조금 전의 침묵을 다행이라는 말로 덮으려는 듯 말이다. 그렇게 말다툼하고 맘 상해하면서도 조촐하게 차려진 밥상에 둘러앉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게 되는 게 가족인가 보다.
상큼한 한라봉 막걸리와 노란 조명에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발신인은 숙소 사장님. 참고로 숙소를 조천읍 산중턱으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별투어’였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사장님께서 별도의 비용을 받지 않고 무료로 별 보기 좋은 곳을 안내해 주신다는 숙소 후기를 읽고 바로 예약했다. 그때부터 부모님과 별천지 하늘을 올려다보는 상상을 머릿속에 그려왔다.
분위기에 취해 헬렐레 올라갔던 입 꼬리가 중력에 끌리듯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그제야 심각성을 느낀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어온다.
“왜? 뭐 잘못됐어?”
“어떡하지, 주소가 있어. 약속 장소까지는 직접 가야 하나 봐.”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미리 물어봤어야 하는데 자책과 동시에 포기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스스로에게 되뇌듯 중얼거렸다. 기대가 컸던 만큼 상실감도 컸다. 부모님은 별투어고 뭐고 나를 걱정하기 바빴다.
혹시나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장님께 전화해 양해를 구해보았으나 사장님은 투어가 끝나면 숙소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일정이 있는 상황이었다. 망연자실 침대에 기대앉아 있을 때였다. 사장님으로부터 또다시 문자가 왔다.
별투어를 가는 다른 손님에게 우리 가족과 함께 가주실 수 있는지 물어봐준다는 것이 아닌가. 죄송함과 감사함에 몸 둘 바를 몰라 방안을 서성였다. 승낙을 얻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늦은 밤, 생판 남을 태우고 운전한다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흔쾌히 승낙해 준 것이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기대하던 별투어를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추위에 벌벌 떨며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면서도 자꾸만 두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낯선 이들이 불편할 법도 한데 그들은 오고 가는 내내 우리 가족에게 한결같이 친절했다. 한없이 다정한 그들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다정한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루에 몇 번이나 불행과 행복을 오갔는지 모르겠다. 어쩜 이리 안 풀리는 걸까 싶다가도 두루마리 휴지 풀리 듯 술술 풀려 버리는 것이 신기한 나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기억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를 넘기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이 폭발한 뒤 곧바로 착실히 재건축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우리 가정의 화목? 사실 별거 없다. 아무렇지 않게 같이 엉덩이 붙이고 앉아 밥 먹고 같이 자다 보면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결국엔 지나간 과거가 된다. 과거형이 된다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제주도 여행이 과거가 된 동시에 추억이 된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