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 열풍
부모는 유아차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안락함을 느낀 곳에서 내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르고 타일러 내리면 신속히 안으로 이동을 유도하기 바쁘다. 저기로 가면 예쁘고 재밌는 것들이 많다며 말이다. 신경을 분산시켜 안락했던 유아차를 잊게 하려 애쓴다.
어린아이들은 대게 애착인형을 데리고 다닌다. 익숙하게 곁에 있던 것이 없으면 불안함을 느낀다. 부모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분리불안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일단 놀이에 한 번 몰입하고 나면 그렇게 소중하게 쥐고 다니던 녀석을 아무 데나 휙- 두고 가버린다. 그걸 찾는 건 부모의 몫이다.
우리의 어릴 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중하게 손에 꼭 쥐고 다녔으면서 크면서 서서히 잊혀가고 잊게 된다. 그것 또한 건강한 현상이라고 본다.
생각해 보면 애착인형이란 녀석은 불안을 느끼던 아이에게는 세상에 걸어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는 존재였다. 어쩌면 부모보다도 의지했을 수도. 나에게도 그런 녀석이 있었다. 맥도날드에서 해피밀 세트를 먹으면 주던 곰돌이 푸 인형이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푸는 어느 날 사라졌다. 딱히 열심히 찾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곰돌이 푸가 주던 푸근함을 잊지는 않았다. 내 정서의 한 조각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떠난 부산여행에서 곰돌이 푸 인형이 너무 반가워 조금 무리를 해서 사버렸다.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무의식에는 늘 네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듯 애착인형과의 인연도 소중하다. 이제는 손에 쥐고 다니지는 않고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잔다. 그냥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가끔 그 존재를 잊고 살다 먼지가 쌓일 것 같을 때마다 빨아서 다시 세워둔다. 생각해 보니 썩 애정을 주는 주인은 아니라 조금 미안해지네. 어쨌든 이게 그리 이상한 모습은 아니라는 거다.
길거리에 나가보면 가방에 주렁주렁 파우치에도 주렁주렁 인형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개도 아니고 다섯 개를 달고 다니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차에 세워두고 자랑하기도 한다. 심지어 쓰레기 수거차도 인형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데 매드맥스를 연상케 한다.
아이, 어른, 여자, 남자, 직업을 가리지 않고 인형에 미쳐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외국인들도 신기해한다고 하더라. 키링은 단순히 귀엽고 예쁘기만 한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정서적 충족감을 준다. 혼자가 아닌 기분이 들 때도 있고 과시욕을 채워주기도 하며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때도 있으며 동질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건장한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더라도 농담곰 같은 키링을 달고 있는 걸 보면 나랑 같은 사람이구나 싶어 웃음이 난다. 뭐 어때! 힘든 세상 조금이라도 웃게 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게 때론 사람이 되기도 하고 반려동물이 되기도 하고 키링이 되기도 할 뿐이다. 전혀 이상할 것 없다.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스스로 만든 의미 속에서 살아가려는 것뿐이다.
참고로 저도 그날 기분에 따라 가방의 키링이 바뀝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