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상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0월 마지막 주,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에 다녀왔다. 부모님과 제주도에 오는 건 2018년 여름 이후 두 번째다. 7년 만이라니! 여름에 찾지 않은 이유는 여름의 제주도에 질려버렸기 때문이 크다.
가장 먼저 찾은 건 애월 바다였다. 몇 번인가 제주도에 왔지만 애월의 바다를 본 적은 없다는 어머니를 위해서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갈치전문점에서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예약하지 않았던 바다뷰 통창자리에 우리가 앉게 된 것이다. 본래 그 자리는 예약된 주인이 있었으나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늦어 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장님이 조용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누가 묻거든 예약했다고 하세요.”
비밀 지령이라도 받은 양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 우리는 식당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애월의 바다는 절로 휴양지가 떠오를 만큼 푸르른 빛을 띠었다. 산에 밀려 파란색으로 표현되지만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이라는 동요가사처럼 정말 아름다운 초록이었다. 바다와 갈치를 번갈아 보며 먹는데 아름다운 풍경에 밥이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예약하지 않은 행복이 찾아오는 것도 여행의 묘미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식당 아래 ‘장한철 산책로’를 걸었다. 가까이서 본 파도는 더욱 위협적이다. 사람들은 관객이 되어 파도가 크면 클수록 환호한다. 우리도 그중 하나가 되어 감탄을 내뱉었다.
곧이어 고내로 향했다. 이곳은 내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곳인데, 한적한 도로 끝에 바닷가 정자가 예쁜 곳으로 유명하다. 제주의 가마쿠라라고 한다는데 그저 우리가 이 아름다움을 뒤늦게 발견했을 뿐이다. 사람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 그곳에 아직 우리가 모르는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다. 문득 조용한데도 멋진 풍경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도 그렇다고. 말이 많지 않아도 깊이 있고 자기만의 분위기가 있는 멋있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저 바다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제주도에 왔으면 당연히 흑돼지지”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난 흑돼지로 유명한 식당을 검색해 ‘큰돈가’를 찾았다. 짧아진 해로 어둑어둑해져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도톰한 흑돼지 삼겹살을 제주도의 멸치액젓 소스에 담가먹으니 자연을 보는 것과 또 다른 의미로 감탄이 쏟아져 나온다. 미미(美味)! 눈이 아닌 혀가 느끼는 미다.
우리의 호들갑은 직원들 앞에서도 계속 됐다. 구워주시는 분 앞에서도 말하고 서빙해 주시던 분 앞에서도 결제할 때도 말했다. 우리의 진심이 전해진 걸까?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콜라 두 병을 서비스받기도 했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도 갚는다는데 이래서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예쁘게 하라 하나보다. 그냥 내던지는 게 아니라 예쁘게 포장해서 건네면 받는 사람도 좋고 나도 좋지 않은가? 불판에서 피어오르는 따끈한 열기에 얼굴이 기분 좋게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