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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다연 Jan 03. 2022

따뜻했던 그 고마운 만남

이름도 모른 채 시작된 4년간의 동거

 이제 막 또 한 살의 나이가 배송되면서 임인년 새 해를 맞이했다. 복 많이 받으라는 지인들의 메시지가 쇄도하는 가운데 올 해도 어김없이 나의 눈가에는 그리움의 이슬이 맺힌다. 너무나 사무치게 보고 싶은 그분이 아른거려서, 차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속 깊이 가둬 두었던 이야기의 일부를 적어 내려간다. 

 밀레니엄 시대를 축하하는 제야의 종소리와 환호가 가득했던 그 시절, 나와 함께 기적을 소원하고 사랑을 나누어준 그분에 대한 잔상이 아직까지도 따뜻하게 남아 있다.     




 3년간의 병원생활 끝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한 나는 엄마와 함께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병원 중환자실은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이 한정되어 있었고, 몇 년 동안 병실 사용으로 인한 병원비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웠다. 

 퇴원을 위한 준비는 1년도 넘게 했기에, 두려움보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엄마의 상태는 일반적인 환자가 아니었기에, 간호에 대한 자격증을 취득하고 병원에서 1년 정도 근무하며 의학서적으로도 많은 학습을 했다. 지금처럼 가정 간호사가 있거나 복지가 잘 되어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퇴원을 한다는 것은 정말 크나큰 모험이었다.     


 언제든 위급상황이 수시로 발생할 수 있기에, 일단 집을 엘리베이터가 가능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집의 안방은 그야말로 중환자실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모든 장비와 기계로 세팅을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마치 영화에나 나올 법한 공간이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집으로 함께 갈 수 있는 간병하시는 분을 만날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간병하시는 분들이 모여서 함께 공동생활을 하지만, 개인 집으로 가면 홀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으며 환자 상태도 워낙 위중했기에 지원자가 없었던 것이다. 집으로 온 나는 몇 달 동안 혼자서 간병을 하느라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고, 몇 분 왔던 간병인들도 하루 이틀 버티기가 무섭게 짐을 싸가지고 가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간병인을 자처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왔다.

 오십 대 후반 정도의 나이에 훤칠한 키와 반듯한 외모, 그리고 이지적인 이미지를 지닌, 도저히 간병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 왔기에 좀 의아한 생각마저 들었다. 더구나 본인의 인적사항을 아무것도 밝히지 않았다. 성명도 나이도 연락처도 없었다. 또한 집에 상주하면서 조건은 컴퓨터를 쓰게 해 달라는 것 하나였다.

 지금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그때는 너무나 지치기도 했고 대안마저 없었기에 수락을 하고 말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분은 몇 번이나 되묻는 나의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N간병협회 소개로 왔으며, 단지 민희 엄마라고 말한 게 다였다. 그렇게 나는 그분의 성도 이름도 모른 채 동거를 하게 되었다.     




 학업과 경제활동으로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가는 날이 대부분인 나는 제대로 엄마를 돌보아 주고 있는 것인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기도삽관(intubation)이 되어있는 엄마는 수시로 썩션(suction)을 해서 가래를 제거해 주어야 했고, 영양분 공급은 비위관 삽입(L-tube)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유치도뇨관(foley catheter)은 장기간 유지 시 요로감염 확률이 높아서 연속된 유지가 어려웠기에 대, 소변을 치우는 것 또한 보통일이 아니었다. 욕창 치료를 위해서는 늦어도 2시간에 한 번씩은 지속해서 환자의 위치를 바꿔주어야 했기에,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과 나의 간병 요구를 그분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나보다 더 정성껏 간호하며 환자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었다. 의심했던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말이다.

 누워있는 엄마를 대신해서 그분은 엄마와도 같은 따뜻함을 내게 주셨다. 일을 마치고 들어가면 맛있는 밥을 지어 주셨고, 세상을 살아가는 노하우를 전수해 주셨다.

 토요일 아침이면 나갔다가 일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들어오셨던 그분은, 명절이고 공휴일이고 구분하지 않고 늘 24시간 함께하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4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하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게 되었던 그분은, 일찍 배우자를 지병으로 보내고 아들과 딸을 혼자서 키우셨다고 했다. 아무런 가족이 없는 줄 알았던 그분에게 대학생 아들과 민희라는 고등학생 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 참 손이 많이 갈 고등학생 딸아이는 집에 놔두고 나의 집에서 함께하고 있으니 말이다.      

 늘 경제신문과 책을 가까이했던 그분은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이었으며,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해서 간병일을 시작한 듯했다. 집에도 못 가고 병원에서 계속 환자만 돌보는 일에 치중하다 보니 본인도 모르게 사업에 실패했던 지난날이 떠오르며 우울감이 밀려왔고, 유일한 낙으로 주식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다. 가정으로 오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하게 되었는데, 막상 와 보니 너무나 안쓰럽고 아픈 마음에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다고 한탄도 했다.

 그분의 도움으로 그 당시 코스닥 초창기 주식시장에서 난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었고, 경제적 위로도 받을 수 있었다.


 절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분은 늘, 나와 엄마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으며, 내가 세상을 버리지 않고 오늘날까지 잘 살아낼 수 있게 만들어주신 고마운 분이다.

 4년 뒤 엄마가 내 마음속 별이 되었던 그날까지 함께 해주셨던 그분은 야속하게도 끝까지 성함도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4년간의 간절하고 아팠던 시간들이 기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상처로 남아 많이 괴로우셨는지 자신을 기억 속에서 지워달라고 까지 하셨다. 또 다른 환자를 위해서도 우리와 함께한 시간들은 모두 지우겠다는 말을 남긴 채 마지막 이별을 맞이했다.      


 그 기나긴 시간을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함께 할 수 있었던 지난날이 참 어이없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립고 보고 싶으며 고마우신 분으로 남아있다. 어려운 형편에 맛있는 밥 한 끼, 감사의 인사 한 번을 못 해드린 게 늘 마음에 빚으로 남아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고 시리다. 같은 하늘 아래서 그분의 건강과 행복을 소원하면서, 세상에는 아직도 온정의 손길이 많이 존재함을 느낀다. 

 온통 상처로 가득했던 내 마음에는 세상의 따뜻함이 들어왔고, 그분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 고마운 마음에 오늘도 온기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책과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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