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밤이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적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분명히 내 입에서 나온 노래였다. 저게 저절로 흘러나올만한 일이 있었던가? 평소 즐겨 듣던 노래도 아니다. 오늘 들은 음악이라고는 '아랑훼즈협주곡'이 전부였다. 기타 연주가 듣고 싶어서 찾아서 듣고 2악장만 몇 번을 돌려서 들었다. 기타의 전주에 이은 호른의 음색에 가슴이 미어지긴 했다. 그래서 '단장의 미아리고개'가 나온 건가. 이것 봐. 제목도 모르고 있었잖아.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치니까 엉뚱한 노래가 나온다. 가사로 검색해 찾아보니 '비 내리는 고모령'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친정에 친인척들이 모였다. 신랑 다루기라고 했다. 신부 훔쳐가는 새신랑은 원래 거꾸로 매달아 발바닥을 몽둥이로 때리는 거라고 겁을 주었다. 장인어른은 과묵하고 장모님은 입으로는 말렸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적진의 한가운데서 몽둥이로 안 맞으려면 '새신랑 노래 한번 하라' 요청이 들어왔다. 주뼛대며 떨리는 목소리로 부른 노래였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적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시골 할아버지 댁에 인사하러 가서도 남편은 이 노래를 불렀다. 아는 노래가 이 한곡뿐인 것 같았다. 나중에 남편의 목소리는 듣기 좋게 미성으로 바뀌었다. 남편이 부르는 '바우고개'는 매번 눈물이 났다. 허긴, 그동안 노래방에 갖다 바친 돈을 생각하면 '파바로티'나 '도밍고'에 끼어 '빅쓰리' 중 하나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시어머니는 남편 군복무 중에 돌아가셨다. 시아버님은 남편이 제대하기 전 재혼하셨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3년이 채 안되어서였다. 제대 후 남편은 아버지의 회사에 취직을 하고 나와 결혼을 했다.
철없이 결혼한 나는 혼자 아이 둘 키우느라 번아웃이 왔다. 남편은 내게 "우리 엄마는" 하고 이야기했다.
우리 엄마는 내 이부자리는 풀을 먹여 빳빳하게 해 놓았는데 우리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만 만들었는데 우리 엄마는 아플 때도 추운 날 목도리를 칭칭 감고 나를 찾아다녔는데 우리 엄마는 내 동생 들은 내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는데
"그래서 우짜라고? 내가 니 엄마가?" 엄마라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적에 부엉새가 울었던지, 웃었던지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내가 저 노래를 불렀다고?
정말 이상한 밤이었다.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어른이 되지 못한 남편의 마음이 스멀스멀 내게 기어 들어왔다. 제대하고 돌아온 집에는 새어머니가 계셨다. 새어머니는 젊고 예뻤으나 말도 표정도 차가웠다. 정해진 식사시간 외 주방은 깨끗했고 잔반은 마당에서 키우던 개 두 마리에게 주고 없었다. 한창 신혼인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보였으나 아들들에게 엄격해지셨다. 오 남매 중 외동딸에게 세상 다정한 아빠였는데, 새엄마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딸의 뺨을 때리는 일도 있었다.
새어머니는 집안의 할머니들을 집으로 모셔서 화투판도 벌이고 음식도 대접했다. 할머니들은 상냥한 새어머니를 이렇게 평했다. "사도 깨고 은도 들어왔다"(사동이가 깨지고 은동이가 들어왔다)
식사시간에 새어머니는 아버지 숟가락에 생선을 발라 얹어주셨다. 아버지가 출근하실 때는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지켜보다 들어오셨다. 낮에 전화가 오면 생사를 모르던 부부가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반겼다.아버지가 퇴근하시면 현관의 신발을 밟으며 굳이 맨발로 뛰어나가 대문을 열어주셨다.
시부모님이 삼만 원을 주시며 '제사장 봐서 남편어머니 제사를 지내라'며 여행을 떠나셨다. 친정집은 종갓집으로 제사가 많았다. 나는 제사음식 냄새가 싫었다. 제사음식이 상에 올라오면 밥을 안 먹었다. 엄마는 내 밥상을 따로 차려주셨다. 엄마한테 전화로 물어가며 제사상을 차렸다. 중학생인 막내시동생은 별명이 쓰레기통이었다. 뭐든 남김없이 쓸어 먹어 붙은 별명이었다. 제사음식을 먹던 시동생이 말했다. "형수, 다른건 다 먹겠는데 이 탕국은 도저히 못 먹겠어요." 자연스럽게 제사는 내 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