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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dhi kim Jan 27. 2023

지식? 지혜?

지식은 화학적 변화를 거쳐야 내 것이 된다

내가 개인적으로 될수록 안 만나고 싶고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보면 자기 과시욕이 강한 사람인 거 같다. 자기 과시욕이란 그럴듯한 표현이지만 한마디로 잘난 척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잘 생겼다 거나 아니면 이쁘다고 봐 달라며 강요? 를 하는 사람, 자신이 부자라고 큰소리친다 거나 아는 것이 많다고 떠벌리거나 아니면 집안이 어떻다고 인맥을 자랑 질 하거나… 등등 마치 자신을 포장해서 시장에 내놓으려는 상인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상인들? 을 만나면 금방 지겨워진다. 많은 것을 안다 혹은 가졌다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못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때가 되면 사라져 버리는 물거품 같기 때문이다. 스스로 멋지다는 외모는 나이 들면 쭈그러들어 없어질 몸이고, 많은 재산도 어차피 죽을 때는 가져가지 못하며, 아는 것이 많다 해도 그 지식은 결코 지혜로 화학적인 변화를 거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닐 것이며 또한 어마어마한 집안이나 인맥이 있다 한 들 죽음 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제는 자기 과시욕으로 똘똘 뭉쳐서 난 척을 해 봤자 그 본질이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를 본인은 미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그 영역이 무엇이든지 간에 결코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 카드’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일상에서도 남의 신용 카드를 내 소유로 할 수 없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 카드’는 무얼 말하는가? 

많은 지식이 있다면 그것이 지혜로 환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식이 화학적 변화를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설탕이나 소금은 입자 상태 거나 물에 녹거나 보이는 모습만 달라졌을 뿐 그 달고 짠 성질은 그대로 다. 고체가 액체로 변해도 고유성분의 단맛 짠맛은 결코 변함이 없다. 이런 물리적 변화와 달리 화학적 변화는 우유가 치즈가 되고 콩이 된장으로 변해서 전혀 다른 성분으로 변하는 것을 화학적 변화라고 한다. 배추에 여러 양념을 가미해 며칠 지나면 맛난 김치로 되는 것도 화학적 변화의 일단 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발효’라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우유가 치즈로 콩이 된장으로 배추가 김치로 변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발효’라는 공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을 화학적 변화라고 한다. 즉, 애초의 것과 성분이 확연히 달라져서 다른 제품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우리가 가진 많은 ‘지식’도 반드시 이런 화학적 과정을 거쳐야 ‘지혜’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책을 통해 혹은 청각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자랑하는 데만 쓴다면 그게 전부이겠지만 지혜로 승화시킨다면 정말로 활용도가 아주 높기 때문이다.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지만 화학적 과정을 거친 지혜는 결코 타인에게 전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혜는 그 당사자 만의 고유 의식으로 표출되기 때문에, 그의 지혜 자체가 그대로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지혜는 다른 형식으로 저절로 밖으로 나오게 된다. 즉, 그 용도가 더 넓게 더 깊게 더 유익하게 널리 활용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 나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정치 지도자도 지혜가 있어야 국민을 유익한 길로 이끄는 탕평정책을 펼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면 국가를 도산위기로 몰고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문득문득 든다. 각설하고, 그렇다면 지식이 화학적 과정을 거친다는 뜻은 어떤 걸까?  

 

지식이 내 안에서 화학적 변화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남의 것이 온전히 ‘내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제품의 변화는 발효라는 화학작용을 거쳤지만 지식이 지혜로 변환되는 화학적 과정이라는 것은 ‘실천’ 혹은 ‘경험’이라는 자기 만의 주체적인 ‘체험’이 반듯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에서는 앎의 다양한 형태 가운데 하나인 ‘이해’의 최상 단계를 ‘지혜 ’라고 규정하며, 감각적 작용을 초월해 최상의 원리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최상의 원리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란 표면상 드러난 모든 현상에 대해 그 심층적인 ‘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능력이야 말로 지식 만으로는 어림없다. 그 지식이 내 안에서 곰삭아 녹여지고 우러나서야 나올 수 있는 힘인 것이다. 그렇게 우러나려면 많은 사색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느끼고 생각하고 고려하고 공감하고 등등의 깊은 내면의 침잠이 반듯이 있어야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걸 마치 책장 넘기듯이 급급하게 넘겨버리는 삶이라면 어디서 지혜의 샘이 솟아 나올까. 

 

한 번은 한적한 시골길을 걷는데 하늘이 너무나 청정하고 푸르고 마치 그림처럼 구름이 뭉게뭉게 다니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아, 저 하늘 좀 봐 너무 멋지지?” 옆사람에게 말하니 그녀 왈, “뭐, 걱정이 없어서 그래요. 난 아이 학원비 걱정에 …” 하늘은 쳐다도 안 보고 땅만 보고 걸으며 퉁명스레 답한다. 물론 그런 걱정이 앞설 수도 있겠지. 그러나 돈도 안 드는 감상의 멋은 한 번쯤 부려볼 수 있는 거 아닌가. 걷는 길에 멋진 하늘 한번 쳐다보며 그 찌든 감정의 무게를 한 템포 덜어낼 수도 있지 않은가. 지혜는 삶에서 한 템포씩 쉬어 주며 가는 긴 세월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식이나 학식과는 상관없이 이런 마음의 여유를 곱씹을 때 우러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자 무식해도 지혜를 갖춘 현자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동양 고전들에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멋진 강의, 감동적인 글 등은 모두 이렇게 그 화자 자신 속에서 녹아 나온 산물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 줄 수 있는 힘이 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소위 입만 나불대는 소음? 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온 말이 남에게 전달되었을 때 많은 공감능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 동양전통의 유교 불교 도가철학 등에서는 한결같이 몸으로 체득해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몸소 실천해야 비로소 가정에서 뿐 아니라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 현자가 될 수 있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공(空)의 이치는 말로 설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깨달어야 붇다의 위치에 오를 수 있으며, 또한 갖은 인고의 세월을 지나 수련의 최고점인 장생불사(長生不死)의 경지는 자신의 힘으로 올라야 신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얻은 지혜의 소유자를 각각 현자(賢者) 깨달은 각자(覺者) 그리고 신선(神仙)으로 부른다.

 

이렇게 보면 지식과 지혜는 하늘과 땅만큼 그 간격이 크다. 지식의 화학적 과정을 거쳐 탄생한 지혜의 소유자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지향해야 할 바가 왜 ‘지혜’ 이어야만 하는 가를, 설명 방향만 다를 뿐 동 서양 고전을 비롯한 모든 인문학 영역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가진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스스로 구분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퀄리아(qulia) 같은 개념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본인 스스로가 의미 깊은 창발적인 퀄리아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거나 또는 뇌의 구조와 기능 등 역사적 맥락까지 폼 나게 설명하지만 정작 뇌의 신경 가소성의 작동 메커니즘을 스스로 체험했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말하지 못한다. 왜? 뇌에 그런 새로운 길을 개척?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런 지식과 정보를 잘 전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 보람찬 일을 하는 귀한 자산이다. 왜냐하면 그 내용을 전수받은 누군가가 그 지식을 통해 직접 체득해 보는 길로 들어설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그래서, 인간의 생명이 너무나 소중한 거다. 살아있는 누군가가 그런 지혜의 길로 나아가 오늘날 꼭 필요한 우주과학 내지는 인공지능 같은 최첨단 영역, 또는 현재는 전혀 예측 불가능한 어떤 임무를 인류 미래를 위해서 실행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고대 현자들처럼 미래세계를 위한 큰 일꾼일 수 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어른들 잘못으로 그 가능성의 싹을 잘랐다는 것 때문에 아깝게 유명을 달리 한 수많은 젊은이 들 소식을 들으면 못 견디게 힘들다.   

 

벌써 세 번이나 외도? 의 글을 썼다.

다음에는 반듯이 내 고유 콘텐츠인 인지능력 확장 <방법> 시리즈  를 쓸 것이다. 그러다가 또다시 불현듯 다른 열정? 이 안 일어나기를 열심히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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