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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dhi kim Feb 12. 2024

내 인생의 '알파'를 찾아서

-01 성장과정-

-시작하며-


2024년 갑진년의 새해가 밝았다.

우리 모두 행복과 번영을 서로에게 기원해 준다. 이제 나이테 한 줄도 더 얹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말하지만 지난해에 대한 소중함은 잊고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제가 있어야 오늘이 있듯이 지나간 해에 대한 역사는 또 다른 오늘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에 가치가 있다. 

 

내일을 위한 원동력 역할의 촉매 작용은 뭐니 뭐니 해도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이 아닐까.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대중적으로 막강한 것은 영화나 드라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체로 두 가지가 아닐까. 극의 사건전개나 주인공의 이야기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동질감을 강하게 주거나 아니면 내게는 없는 자질이나 삶의 방식이 주인공을 통해 크게 감동을 받을 때다. 그렇기에 우리 각자는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에 열광하면서 마치 내가 겪는 것 같은 아픔과 사랑을 동시에 느끼며 희로애락을 함께 공유하게 된다. 그러면서 각자가 희망한 교훈을 스스로 얻어낸다. 

 

며칠 전 <저스트 머시>라는 영화가 필자에게는 두 번째 속하는 이유로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실화에 바탕을 둔 2019년 작품인데 한국에는 미개봉 영화다. 하버드를 나온 흑인 변호사가 어릴 때 경험한 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계기로 인권변호사가 된다. 백인들이 범죄로 몰아 교도소에 갇혀 사형날짜를 앞두고 있는 무죄의 흑인들을 위해 변호에 나서면서 극은 전개된다. 흑인을 향한 인종 차별적인 대우를 극복해 가며 무료 변론에 나서는 브라이언 스티븐슨의 이야기를 보면서 코끝이 시큰한 감동이 몰려온다. 법의 영역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는 감상과는 별도로, 사법기관의 백인들이 변호사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치욕적인 멸시와 모욕을 가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참아내며 인내하는 모습.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받는 여건에서도 마침내 일을 성취해 내는 힘든 과정이 필자로서는 너무 훌륭하고 존경스러웠기 때문이다.


 봉사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그런 치욕을 참아내면서까지 해 내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 결과로 소중한 한 사람의 목숨을 건져 낼 수 있다는 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인간 승리를 보는 듯했다. 뭔가를 이루어 낸다는 것은 또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모진 인내와 시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해낼 수 없기에 인간승리라고 할 밖에. 누군가의 그런 승리는 나비효과가 되어 중요한 시점에서 누군가의 삶의 계기로 또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반듯이 똑같은 영역이 아니어도 말이다.                

                     

앞으로 나올 우리의 주인공 원준희가 살아온 역정의 드라마도 여기에 한몫을 더 할 수 있다. 한 가지 목적을 향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가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 과의 ‘만남’ 그리고 이겨내기 위한 시련들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결국은 귀한 결실을 얻어냈으며 그 결실을 누구나 공유할 수 있도록 나누고 싶은 주인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성장과정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저마다의 성향, 특기 그리고 개성의 원천은 아마도 전생의 습성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누구는 악보도 없이 더구나  배운 바도 없는데 작곡을 한다 거나 혹은 멜로디만 듣고도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들을 보노라면, 아마도 전생에서 늘 해 왔던 습관에서 나온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타고난 유전자 때문이라는 과학적 이야기 보다 훨씬 더 와닿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디 연주자뿐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화가, 삶의 메시지를 던지는 철학자도 이에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 각자의 삶이 어떤 습성을 가지고 태어났는가 와는 별도로 그 특성이나 개성을 잘 발굴해서 키워야 함은 의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동안의 환경이 두 번째로 중요한 삶의 요소다. 어떤 국가 어떤 부모 그리고 어떤 환경이 그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핵심이 아닐 수 없다. 

 

원준희는 마침 그런 부모를 만났다. 그녀의 부모를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자식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 부모였다. 이런 표현을 하고 보니 이즈음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기시감이 든다. 그렇게 매사 부모가 나서서 참견하고 판단하고 결정해 주면 그 아이가 할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니 괜스레 나 보다 약해 보이는 애들에게 할 못된 생각에 젖어들 수밖에 없는 건 아닐까? 부모가 알아서 다 해주는데, 내가 내 맘대로 할 것이 없는데 심심하니 에너지가 밖으로만 분출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라. 살아있는 존재는 어디라도 에너지를 쏟지 않고는 못 배기는 욕구의 덩어리다. 


인간의 저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욕구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생명의 에너지다. 방송으로 송출되는 매체에서 ‘생방송’ 혹은 ‘Live’라는 단어가 화면 한 귀퉁이에 나와 있다면 그건 생생히 지금 내보내는 전파 송출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미리 만들어 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든 움직임이나 말이 생방송으로 나가면 출연자들의 에너지를 그대로 감지할 수 있다. 심지어 이즈음의 통신기계 발달은 순간순간 스치는 그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 까지도 표정을 통해 낱낱이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살아있음은 끊어지지 않는 생명력의 에너지 송출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에너지가 적절히 쓸 곳이 있어야 하는데 부모가 알아서 다 해준다면 그 아이의 에너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아직 가치판단을 제대로 내릴 수 없는 아이의 욕구가 우연히 선한 방향일 수도 있고, 나쁘고 악하기까지 할 수도 있다. 그 욕망은 성장하면서 남을 괴롭히거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벌기, 각종 도박이나 성 혹은 마약 등에 빠지거나 혹은 힘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되면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데 쓸 수 도 있다. 

 

문제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자세가 그 자녀들의 향방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원준희의 부모는 정말 드물게 보는 부모상이었다. 1960년대는, 여자는 20세가 넘으면 혼기에 접어들어 누구나 시집을 가야 하는 시기였다. 이즈음의 싱글이니 비혼이니 하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때였다. 그녀의 부모는 막내딸인 준희의 결혼 준비로 당시에 유행하던 세간살이들을 장만했다. 미제 다리미와 김장 같은 집안 큰일을 할 때 쓸 스테인리스로 된 대야(양푼) 세트 다. 지금도 그 미제 다리미와 상표가 붙어있던 큰 그릇 세트가 창고 한구석에 고이 모셔져 있던 것을 그녀는 기억한다. 풍습에 따라 혼수 마련까지 한 준희의 부모는 어쩐 일인지 딸에게 한 번도 결혼하라고 다 그 친 적이 없다. 그저 때가 오면 줄 물건들을 하나하나 장만해 두었을 뿐이다. 그런 부모의 마음과는 다르게 준희는 결혼은커녕 멋진 웨딩드레스가 전시된 진열장 앞을 지나면서도 입어보고 싶다는 느낌조차 안 들었다. 

 

무려 중학교 2학년까지 당시 어린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던 놀이인 소꿉장난과 연극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흙과 풀잎으로 밥과 반찬이 되며 냠냠 먹는 소리로 성찬에 감사놀이까지 하면서 놀고, 집 마루 창문에 쳐 놓은 커튼을 닫고 열기를 거듭하며 마당에 서있는 서너 명의 아이들을 상대로 연극놀이를 했다. 높이 솟아 있는 엄청난 규모의 한옥 옆집에 살았던 준희네는 그 집 현관으로 향하는 돌계단이 소꿉놀이에 1층 집과 2층집 그러다 아이들이 많아지면 3층집이 되곤 했다.  중학생임에도 소꿉놀이를 놓을 수 없던 준희는 그래도 부끄러운 느낌이 들긴 해서, 어른들이 보면 다 큰 애가 소꿉질이나 한다고 흉볼 까봐서 누가 지나가면 슬쩍 아닌척하며 딴청을 하기도 했다. 지금 세대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생리를 하며 성의 세계까지 눈길을 돌리는 조숙한 지금의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놀이는 동화 속에나 있는 유아기 놀이가 아닌가. 

 

그렇게 또래아이들과 몰려다니면서 소꿉놀이며 공차기 등 함께 어울리며 성장하는 것이야 말로 건강한 인격체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성장기 아이들의 펄펄 끓어오르는 에너지 분출을 건전한 방향으로 소모시키며 나 아닌 남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환경에서는, 나보다 약해 보이는 아이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빵 셔틀을 시키는 등의 나쁜 의지가 작동될 여지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즈음 부모들은 어떤가? 유치원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비가 오는 날 한 아이의 우산이 없어졌다고 한다. 유치원 측은 부모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오후가 되어 아이들이 집으로 갈 시간인데, 갑자기 경찰들이 유치원으로 들이닥쳤다는 것. 알고 보니 그 부모는 경찰에 우산 분실을 신고해서 경찰이 출동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일단 신고가 들어가면 출동해야 하는 절차에 따른 거란다. 이 이야기를 듣는 나는 놀라워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분실했던 우산은 나중에 다른 아이와 바뀌어진 것이 확인되었다. 그 아이는 이후에도 아이들과 놀다가 툭하면 아빠한테 이르겠다고 한 단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이즈음 부모들의 과한 자녀보호가 결국에는 아이의 인성까지 망치는 결과로 치닫는 것이 무섭다. 유치원 어린아이가 벌써부터 내 뒤에는 든든한 부모의 배경이 있다는 의식이 자리 잡아가는 것이다. 아이가 독립적으로 문제에 부딪치며 생각하고 해결하는 대신에 부모에게 기대어 생각과 해결점을 찾는 것이다. 참으로 어긋나는 출발인 셈이다. 어려서부터 아이가 스스로 해내야 하는 당연하고 사소한 일들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 의지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구조가 형성되는 순간인 거다. 그런 의식의 구축과정을 거쳐 성장하면 올바른 정신을 가진 건전한 사회인이 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필연적으로 자아에 대한 자존감이 결핍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캔버스 앞에 붓을 들고 앉은 것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없는 세계를 마주한 아이들은 그곳에 자신만의 새 집을 그리며 지어 나가기 시작한다. 하나하나 경험하고 배우면서 세상과 이웃을 알아가고 공동체 생활을 익혀 나가야 하는데 그만, 중간에  부모가 그걸 가로막고 있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 아이는 자신만의 집 짓는 일을 중지하게 된다. 아마도 그 아이의 무의식 속에는 멋진 나만의 집을 지으려던 계획 따위는 아예 집어치우게 될지 모른다. 시쳇말로 “에라~모르겠다” 같은 감정. 그때부터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그저 본능에만 충실한 삶의 여정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만의 멋진 집을 지을 계획도 의지도 사라지니 자연스레 그 아이는 무의식적 충동에 이끌리게 된다.

 

그 무의식적 감정이란 두려움, 폭력, 성적인 충동, 비이성적 소망, 음란한 욕망, 이기심 같은 단단하고 부정적 성향의 덩어리가 의식의 내면 저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무의식의 덩어리는 마치 빙하처럼 우리 내면에 깊이 잠겨 있기 때문에 정화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그대로 대상을 향해 직진해서 해악을 저지르는 행위로 이어지게 된다. 무의식을 정화한다는 것은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에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자연스레 배움으로 익혀서 실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누군가에 의해 브레이크가 걸리게 되면 멈추게 되니 무의식의 부정적인 성향이 그대로 생각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쾌감과 즐거움 마저 느끼게 되니 정말, 결코 나타나서는 안 될 추악한 괴물 아닌 괴물의 모습으로 서서히 돌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항목들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히트를 치는 것을 보면 그런 유형들이 학교와 사회 곳곳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그런 부정적인 세계가 인간의 무의식 저편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세상에 드러나 경종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종을 열심히 울려도 왜 그런 아이들이 양성되고 그런 어른들이 나오게 되는 가 하는 진단에는 여전히 만족할 만한 내용을 찾기 어렵다. 필자는 그것이 어린 나이에 부모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 막혀버린 자신만의 집짓기 작업이 포기된 데서 출발한다고 본다. 어린 나이에 그런 신나고 멋진 작업을 타인에 의해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인간은 내면 저 깊은 곳에 자리한 부정적 성향의 무의식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데 열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 마음속 깊이 단단히 잠겨 있는 무의식의 작용이 95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런 무의식이 표면상으로 나와있는 의식의 5퍼센트에 작용해서 매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을 보고 첫인상을 판단하는데 5초면 충분하다고 한다. 내가 의식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무의식에 의한 결정적 역할임에도 우리는 단지 자신의 이성적 판단이라 믿고 있을 뿐이다. 즉, 나의 결정이나 판단이 무의식에 의해 내려진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무의식을 내가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아니 어떻게 하면 무의식의 영향이 아니라 내 의지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그 해답을 찾으려면 무의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의식의 구조가 머리 형상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95퍼센트는 물에 잠겨 있는 채로, 5퍼센트의 의식은 표면 위로 드러나 있다. 이때 의식은 크기가 작은 만큼 힘도 약하다. 그러나 잠긴 95퍼센트의 무의식은 엄청나게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의식이 힘들어 지칠 때 이끌어주는 든든한 역할도 한다. 말하자면, 체력이 약하면 인내력이나 추진력에 한계를 드러내나 무의식의 강한 힘이 그 허약함에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격증이나 시험 합격을 위해 누군가가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자. 그런데 평소 안 하던 공부라 하기 싫어지고 게을러질 때 그의 무의식은 처음에는 주인의 심기에 따라 동조하지만, 그 주인이 '내가 이렇게 게으르면 안 되지!' 하며 마음을 다잡고 하고자 노력하면 그때 무의식은 그 거대한 힘으로 그의 버팀목이 되어 그의 방향도 서서히 '해내자!'라는 방향으로 주인을 다잡아 이끌게 된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 번씩은 해 봤을 듯싶다. 

 

우리의 무의식은 이렇게 의식이 살살 꼬드기며 하자고 하면 함께 해준다는 것이 참으로 보물 같다. 의지적으로 마음만 다잡고 뭔가 해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변화 가능한 것이 무의식의 존재다.  더구나 내 자아실현을 위한 엄청남 힘의 원천은 그 무의식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힘의 원천이 되는 무의식을 어떻게 잘 조정해서 멋진 자아를 형성하는데 활용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그것이 스스로 각자가 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 성장과정에 있는 아이가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부모는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통해 기다려 주는 것이 필요하다. 부모는 아이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여유롭게 지켜봐 주고 충분한 대화로 소통해야 한다. 아이가 그려 나가는 자신만의 세계를 곁에서 봐주면서 관심을 가지고 가끔은 부모의 의견도 보태면서 아이로 하여금 부모는 항상 자신을 바쳐주는 든든한 후원자라는 인식으로 안정감 있는 아이로 성장하게 하면 된다. 부모가  조급해서 자녀를 닦달한다 거나 그 새로운 방향을 이렇게 저렇게 마구 본인들의 구미에 맞게 흔들어대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장 가슴 아픈 일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는 준희의 어느 동창 이야기가 있다. 아주 아름다운 미모에 팔등신의 몸매까지 가진 그녀는 교내에서 동경의 대상으로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 공부까지 잘해 대학을 전교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어, 당시 [선데이]라는 유명 연예 주간지에 사진과 함께 기사까지 실렸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해서도 계속해서 전공인 철학 공부를 하고 싶어 했으나 그 부모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이 멋지게 자란 딸에게 걸맞은 든든한 남편감을 사위로 보고 싶어 했다. 부모의 지속적인 바람을 무시할 수 없던 그녀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다. 당시의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그 주간지에 또다시 실렸었고 많은 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이 이야기는 아이가 성인이 된 다음에도 늘 자녀를 소유물인양 놓아주지 않는 부모들에게 경종을 주는 내용이다. 지금의 젊은 부모들은 유치원부터 참견하기 시작해서 심지어 군대에 간 자식들에게 그리고 결혼까지 했는데도 도무지 자녀들을 놓아주지 않는 거 같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하나하나 주춧돌을 쌓아 올리듯이 자신 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야 할 자녀의 미래를 부모가 막는 꼴인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들의 수준 낮은 욕망 때문에 그리고 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그 부모는 자존감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상대의 자존감도 헤아려줄 줄 알며 공감능력이 뛰어나게 마련이다. 

 

이즈음은 높은 자리에 임명될 정치인들이 청문회에서 밝혀지는 그들 자녀들의 학폭과 관련한 추악한 과거 때문에 왈가왈부하는 것을 보노라면, 이제는 그런 해악들이 세상에 드러나는 시대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그래도 인간의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위안 아닌 위안을 받는다. 그러니 언젠가는 우리의 삶이 모두가 행복하고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도 괜찮은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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