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iddhi kim
Feb 26. 2024
지난주 연재에 올려야 할 글을 실수로 일반에 올리면서 연재에서 누락되었습니다. 이번 주는 혹시 지난주 누락으로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지난 호의 글과 함께 이어 -엄마의 위기-난으로 이번 주 예정된 글을 함께 올립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시기 바라며 두 손 모아 깊이 사과드립니다.
준희의 부모는 다행스럽게도 딸에게 그런 브레이크를 거는 일은 없었다.
학교 성적이 반에서 중간아래로 밑돌아도, 소꿉장난을 어두울 때까지 하며 놀아도 야단을 치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3학년 봄, 소풍 가는 날이 왔다. 가방에 김밥이며 과자 음료수등 가방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잔뜩 챙겨준 먹거리를 무릎에 놓고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문득, 한 생각이 준희의 뇌리를 스쳤다. ‘아, 엄마가 이렇게 소풍 간다고 정성스레 맛난 것을 많이 챙겨 주셨는데, 난 공부는 안 하고 늘 놀기만 했구나. 정말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생각이 뇌 속을 후려치며 동시에 가슴이 저며지는 듯한 죄송함이 절절하게 솟구쳤다. 준희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미안함과 후회의 통곡은 마치 속죄하듯이 펑펑 하염없이 울어재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놀라서 준희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다. 중학교 2학년까지도 아동기 수준에 있던 준희가 3학년이 되어 비로소 철이 드는 찰나였다. 참으로 늦다. 당시 중학교 2학년 정도면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생리를 시작했는데 준희는 그때까지도 없었기 때문에 더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준희의 생활은 360도 전환되었다. 소꿉놀이는 물론 친구 만나는 일도 없이 책상에 앉아 밤이고 낮이고 공부를 했다. 한옥이던 집에서 초저녁에 시작했던 공부가 화장실을 가려고 밖으로 나오니 마당이 너무 환해서, ‘어디서 불이 났나’ 하고 놀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준희는 어딘가 몰두하기 시작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의 집중력을 가졌다. 얼마 전 소꿉놀이와 연극놀이가 그랬듯이. 준희가 부러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간식 먹으며 책을 볼 수 있고 공부하면서 음악도 듣는 멀티 기능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한 번에 한 가지 일 밖에 못한다. 한번 집중하면 아무것도 눈에 귀에 들어오지 않는 특이한 체질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그녀는 결국 인생의 플러스 '알파'를 얻었는지 모른다. 한번 마음먹으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매진하는 체질 그리고 그런 특성을 가질 수 있도록 간섭하지 않았던 부모의 배려 덕분이다.
중고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갔다. 준희에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거다. 늘 입어야 했던 교복에서 해방되고 학교 수업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71학번의 신세계가 열렸다. 지금의 강남거리처럼 당시는 명동이 볼거리 많고 화려한 최고의 거리였다. 친구와 함께 수업이 끝나면 의례 명동으로 가서 점심 먹고 종로로 가서 단성사나 피카디리 극장으로 갔다.
두 극장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음이 특이했다. 예약제가 없던 때라서 그 앞에 가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면 된다. 매일매일이 파티 같은 여유로 맛난 점심에 영화 관람에 혹은 명동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거나 또는 쇼핑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준희는 학과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는 맛에 탐닉하며 즐거운 대학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그 친구들 가운데 유독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한 사람 때문에 준희 인생의 첫 번째 대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인연 복-
덕담 가운데 가장 흐뭇 한 말은 ‘그 사람, 참 복이 많다’가 아닐까. 이런저런 복의 종류가 많지만, 인연복만큼 큰 복은 없다. 인연복은 사람 만나는 복을 의미하니, 그 만난 사람이 내 앞길을 창창하게 열어 줄 수도 있고 혹은 내 평생의 동반자가 될 수도 있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내 인생이 좌우될 수도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재물이나 명예나 지위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일 아닌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부도 명예도 지위도 거머쥘 수 있게 되니, 인생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 하는 인연복이야 말로 복중의 복으로 으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생에서 그런 큰 복을 줄지도 모를 '만남'을 그냥 넘겨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거다. 스스로 복이 없다고 탓하기 전에 혹시 큰 복을 놓쳐버린 건 아닌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우리의 주인공 준희는 그런 결정적 계기를 안겨준 사람을 만났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런 '만남'을 스치듯이 지나치지 않고 그 정서를 소중하게 차곡차곡 마음 한편에 쌓아두면서 준희 인생의 큰 결실을 이루는데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 맞는 거 같다.
엄격한 중고교 시절을 지나 자유분방한 대학생활을 즐기던 같은 학과 친구다. 고영순은 어쩐지 나이에 걸맞지 않은 품위가 있었으며 만날수록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준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매일 다른 옷과 장신구로 온몸을 휘감으며 멋 내기에 몰입했다.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 모를 정도의 무아지경 같은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옷을 너무 많이 사서 매일 다른 옷을 입어도 한 계절 동안 겹치지 않을 정도였으며 진주와 보석의 장신구들도 옷마다 다르게 치장해도 될 정도로 멋을 부렸다.
그때도 준희의 부모는 낭비가 심하다는 잔소리 한번 없이 뒷받침을 해 주었다. 준희가 태어나기 전 세 명의 아기가 죽고 나서 느지막이 막내로 태어난 준희는 그저 부모의 귀하디 귀한 기쁨이었던 것도 한몫했을 듯싶다. 거기다 준희는 한번 어딘가에 꼬치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성향이라 어떤 다른 계기가 오지 않는 한 이 요란한 멋 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듯싶다.
대학생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당시 유행하던 초미니스커트도 입고 다녔다. 윤복희라는 가수가 유행시킨 미니스커트는 대한민국의 젊은 청춘들을 사로잡았다. 준희도 뒤질세라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다니다가 너무 짧아 경찰서에 경범죄로 잡혀가기까지 했다. 당시에, 여자는 치마 길이가 무릎 위 15센티 넘게 짧으면 안 되고 남자는 머리카락이 너무 긴 장발이면 경찰에 경범죄로 붙들려 갔다.
그러나 늘 함께 다니던 고영순은 종아리까지 오는 긴 원피스에 그것도 옥양목 천에 꽃무늬가 있는 결코 세련되었다고 볼 수 없는 옷차림이었지만 이목구비가 정교하며 뭔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위기, 말수는 적으나 밥 먹고 영화 보는 일에 가끔씩은 10만 원짜리 수표까지 내미는 그녀를 보며 신비하고 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준희가 성장하는 동안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짚어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준희 말에 호응만 해줄 뿐. 그런데, 같은 과에 이영숙이가 있었다. 그녀는 대학 근처가 집이라 걸어서 학교에 오며, 원래 집은 지방이라서 대학 근처인 언니 집에 거주한다고 했다. 영숙은 수업이 끝나면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 조카를 봐주어야 하는 처지였다. 가끔 봐줄 사람이 없다고 조카를 학교에 데리고 오기도 했다. 그런 처지라서 우리 랑 함께 어울려 명동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은 상상도 못 했다. 문제는, 고영순이 그런 영숙이를 몹시 챙긴다는 거다. 우리 랑 시내에 나가 어울려 다니며 밥 먹고 차도 마시고 영화도 보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없는 영숙을 영순이가 알뜰이 마음 써주는 것을 보며 준희는 그런 영순이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고영순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그저 열심히 매일 수업만 끝나면 함께 명동으로 싸돌아 다녔다.
-마치 번개를 맞은 듯한 느낌-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영화를 보고 나와 밥 먹을 시간이었다. 그날은 오전 수업이 휴강이고 오후 수업은 없는 날이라 일찌감치 종로거리로 나와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으러 걸어가는 중이었다. 준희가 팔짱을 끼며 묻는다.
“우리, 오늘은 뭐 먹을까?”
영순이 한동안 대답이 없다. 그러더니 말한다.
“난, 오늘 안 먹고 싶어.”
“왜???”
늘 하던 일상을 거부하다니..., 준희는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묻는데,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더 놀라웠다.
“지구 한편에서 누군가는 저렇게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 가는데 어떻게 내가 음식을 먹을 수 있어?”
그날 우리가 보았던 영화는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것을 그린 내용의 다큐멘터리였다. 준희는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대답에 그만 머리를 한 대 쿵 쥐어 박힌 강한 충격을 받았다. ‘아, 이럴 수도 있는 거구나. 지구 저편에서 굶는 사람을 염려할 수도 있는 거구나.’ 문득 뇌 속으로 번개가 치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그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점심도 거른 채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준희는 그 이해할 수 없던 충격을 고스란히 가슴에 묻었다. 생각의 영역이 넓혀지게 된 첫 계기였다. 자기 자신과 가족 이외에 다른 사람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준희가 이 세상에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가족처럼 생각해 주어야 한다는 느낌이 난생처음 들었던 거다. 그러면서 왜 영순이가 늘 조카를 봐주느라 함께 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던 영숙이를 그토록 알뜰히 챙겨주었지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복잡하고 화려한 명동 거리를 걷는데 문득 영순이 말한다.
“난, 이 사람들이 모두 죽은 시신으로 보였으면 좋겠어.”
“어~엉 왜? 무슨 소리야?”
너무 놀란 준희는 그만 소리를 질렀다. 영순은 설명한다.
“이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옷이나 얼굴 같은 외모에 신경 써야 하니 이 사람들이 모두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롭겠어.”
‘이건, 또 뭔가’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던 준희는 이 말 자체를 또 고이 가슴속에 묻었다. 생각해 보면 준희는 소꿉장난에 학교 공부에 그리고 이제 대학에 갓 입학한 지라 인생을 논하는 책이며 또는 심오한 세계를 말해 줄 사람도 주위에 없던 터라, 이런 철학적인 내용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당연했다. 준희 부모는 강원도 산골 아주 외진 지역인 양구에서 1953년 6.25 전쟁을 피해 서울로 피난 와서 준희를 낳았다. 12년 위 언니와 20년 차 오빠가 부모와 함께 전쟁을 피해 산골에서 서울로 이사 온 터라 가족 누구도 학교 생활을 제대로 했을 리 만무다. 그러니 집안에서 누가 책을 읽는 다든지 하는 지적인 분위기 자체가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 1면에 대문짝 만하게 실리는 ‘데모’라는 글자를 보며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당시는 유신정권인 박정희시대였다. 늘 거리는 대학생들의 데모로 경찰이 수류탄을 터트리는 바람에 눈물이 나서 밖에 나가기 조차 힘든 시기였다. 준희의 질문에 오빠는 대답대신 마루 창틀을 잡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라는 당시 유행가 노래를 대신 불러댔다. 아마도 어린아이에게 정치 이야기를 해줄 리 만무했거나 아니면 오빠 자체가 그런 일에 관심이 없거나 했을 것이다. 나중에 자라서 오빠는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음을 알게 되었지만 만약 그때 오빠가 당시 정치 사회 상황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더라면, 아마도 준희는 그런 분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정치가나 시민운동 같은 세계로 뛰어들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번씩 하곤 한다.
-엄마의 위기-
6.25 사변으로 강원도 산골에서 서울로 피난 와 막내 준희를 낳았던 엄마는 전쟁으로 먹을 것도 잠잘 곳도 변변치 않았던 대혼란의 시기에 먹고살기 위한 대책도 마련해야 했다. 준희모친은 아버지보다 먼저 돈벌이에 나섰다. 뭔가를 해서라도 먹거리를 얻어야 했지만 전쟁이 막 끝난 터라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없었다. 생각 끝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통에 앉아 죽을 쒀 팔기로 했다. 전쟁통에 곡물도 부족한 처지라 사람들은 죽이 값도 싸고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소위 가성비 좋은 죽장사가 대세였다. 준희 엄마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너도 나도 죽을 만들어 팔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손님들이 준희엄마가 파는 죽통으로만 몰려들어 다른 장사꾼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면서 차차 집안에 온기가 도는 넉넉함이 생기기 시작했고 준희 엄마는 열심히 돈을 벌어 여기저기 땅을 사고 집을 사두는 일을 했다. 부친은 뭔가 하겠다고 나서면 꼭 다 털어 먹고 들어왔다. 그러니 집안이 일어나게 된 건 순전히 모친 덕이었다.
준희를 낳고 이렇게 집안을 일으키긴 했지만 엄마는 대신 애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 그만 속칭 '해산바람'이라는 병에 걸렸다. 당시 엄마는 아기를 낳은 지 일주일 후, 아직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 끝자락에 시장통에 앉아 장사를 했으니 오죽할까 싶다. 그 이후로 엄마는 몸이 냉해 항상 뜨거운 방에서 몸에 이불을 두르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 엄마를 보며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냈던 준희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항상 아픈 사람이었다.
하루는, 엄마가 부른다. 엄마 방은 너무 더워서 늘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방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들어오라며 부른다. 가보니 얼굴색이 검어 보이며 여느 때와 달랐다. 엄마는 힘 겨워하며 말한다.
“돈은 어디에 있고 금 부치는 어디에 있고 집문서는 어디에 있다. 이제 나는 오래 못 살 거 같으니 니 가 알아서 잘 챙겨야 한다.”
엄마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 보여 무서움 마저 느낀 준희는 너무 놀라 엄마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울기 시작한다. 엄마는 그러는 준희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간다.
"너 어렸을 때, 등에 업힌 널 보면서 지나가던 행인이 '이 아이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튕기고 살 겁니다' 했던 거 생각나지? 엄마가 그랬지? 그러니 난, 니 걱정 안 할 거다. 너도 엄마 없다고 너무 속상해하면 안 된다 "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가. 엄마는 늘 아프지만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을 단 한 순간도 해 본 적 없는 막둥이 준희는 밤새도록 엉엉 울었다. 엄마가 이대로 가시면 절대로 절대로 안된다는 절실함에 준희는 무어라도 해서 엄마를 꼭 살려내고 싶었다.
그때 문득, 엄마가 다니던 비구니 절이 대전에 <세등선원>이라는 사찰도 세웠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엄마 따라 가 본 적이 있는 그 절은 서울에 있는 절보다 전망도 좋고 넓으며 깔끔한 분위기가 준희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곳에 가서 기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와 오빠는 준희 초등학교 다닐 때 이미 결혼들을 해 나가 살고 있어서 준희 혼자 부모와 살고 있었다. 다행히도 엄마가 늘 편찮으셨기 때문에 집에는 항상 집안일을 돌보는 식모가 함께 살았다.
다음날 곧장 대전으로 달려간 준희는 간절한 마음으로 법당에서 절을 시작했다. 열심히 기도하면 부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강한 믿음을 더했다. 초겨울이던 추운 날 법당 대웅전에서 밤새 절하면서 기도 할 거라는 준희의 의지 표명에 스님들은 처음에 극구 말렸지만 결국 스님들이 자신들도 동참하겠노라며 몇몇 분들이 준희와 함께 절을 시작했다. 혹시 밤새 절하는 동안 소변이 마려우면 쓰라고 요강을 불상 뒤편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