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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dhi kim Apr 22. 2024

인도인으로 살아가다

-푸자, 사리 그리고 요기들--

-지도 교수와 논문 점검일-

누군가 이른 아침부터 사리를 챙겨 입는다면 그날은 지도교수 만나는 날이라는 것을 기숙사생들은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네팔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친구는 지도교수 면담 날에는 의례 아침부터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한다. 긴장감이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구토를 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준희도 지도교수에게 논문 점검받는 날이면 희망과 긴장이 교차되는 감정을 느끼며 타자로  내용물을 들고 연구실로 찾아간다.  교차 감정이란 준희가 작성한 내용을 지도교수가 흔쾌히 수락할 것인가 아니면 퇴짜를 놓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다.

 

지도교수는 학과 교수회의에서 정해지는데 준희의 지도교수는 카스트가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분으로 깐깐한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었다. 학과 교수 중에  분은 정말 성자 같은 교수님이 계셨는데 산스크리트와 파리어 등 고전원어를 강의 시간이면 교재도 없이 줄줄 인용하며 설명해서 모든 학생들이 감탄하며 존경하는 분이셨다. 항상 인도전통의상을 걸치시고 브라흐만 계급에 깨달음을 얻은 성자 같은 멋진 분이셨다.


어느 날, 그 교수님은 강의 중에 지혜라는 의미에 대해 설명하면서 준희에게 지혜라는 뜻의 인도 이름 쁘라 지어주었다. 이후로는 준희를 쁘라갸라고 부르곤 하셨다. 내심으로 준희는 그분이 지도교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했었. 반면에 준희의 지도교수는 인도 스타일의 양복을 입고 다니는 점잖은 서구 타입이었다.  번씩 논문 점검을 받으러 집으로 오라고도 했는데, 가면 짜이와 함께 맛난 간식을 얻어먹을  있었다.

 

어느덧 인도에    해가 지나가고 1984년이 되었다. 영어강의 이제는 별문제 없이 따라가며, 고전어 자격증 과정도 열심히 다니면서 자신감이 붙고, 요구르트 덕분에 건강도 문제없고 논문도 열심히 격주로 깐깐한 지도를 받으며 서서히 인도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일요일이면 근처 까무라 나가르 시장에 사람이 끄는 자전거 뒤에 앉을  있는 의자가 장착된 닉샤를 타고 과일이나 넛트류를 사러 다녀오곤 했다. 과일은 냉장고가 없으니  책상  침대 머리맡에 장식  쟁여 두고 먹었다.

 

인도 학생들은 그렇게 과일을 쟁여두고 먹는 것이 몹시 부러운 듯이 쳐다본다. 그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옆방에는 일본인 학생이 있다. 그녀는  번씩 라면을 끓여 먹나 본데  번도  젓가락이라도  적이 없다. 근데  끓이는 맛난 냄새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데 어찌나 힘들던지….  입만 달라고    없고. 이럴  알았으면 한국에서도 라면을 가져왔을 생각도 못했던 품목이었다.  


일본인들은 절대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친한 친구로 발전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인도에 온 지 2년이 넘었다는데도 영어가 몹시 서투른 그녀는 단정한 단발에 뽀얀 얼굴로 혼자서만 다녔고 일본의 맛난 라면을 거의 매일 끓여 먹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같다. 인도 음식을   먹는 것은 그녀도 당연할 테니 말이다. 준희가 요구르트 만들어 먹는 방법을 대체 음식으로 택했다면 그녀는 라면으로 대신하는 듯했다.

 


-동물과 함께 하는 삶-

인도 거리에는 곳곳에서 마주하는 동물들이 있다.  들은 간간이 보이는  아니라 아예 자연스레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차가 다니는 거리에도 시장바닥에도 하얀색의 소나 코끼리는 어슬렁거리며 다닌다. 자동차 운전자들이나 사람들은 그들을 가라고 화내며 내쫓는  아니라 기다려주거나 피해서 지나간다. 함께 공존하는 모습이다.


그늘이 있고 나무가 우거진 곳에는 으레 원숭이들이 함께 산다. 그들은 여기저기 건물 사이로 옮겨 다니며 과일이나 채소를 훔쳐 먹는다. 우리식으로는 훔쳐먹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데 그들은 가져다 먹는다로 말한다. 왜냐하면 원숭이나 소는 인도 전통종교인 힌두교에 따르면 모두 신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이 원숭이나 소로 환생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런 신의 화신인 원숭이나 소에게 화를 내거나 때리는 일은 상상도   없다.  번은 기숙사 주방 창고에 원숭이가 들어와 당근을 들고나가는 것을 목격한 기숙사 주방 셰프가 원숭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합장하고 기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경건한? 광경은 몇십 년이 흐른 뒤에도 준희에게 사진처럼 남아있다.

 

하루는, 아침에 눈을 뜨니 원숭이가 방에 들어와 사다 놓은 바나나를 들고 준희를 쳐다보면서 앉아 먹고 있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보이는 모습에 너무 놀라 베개를 들고 때리는 시늉을 하며 어서 가라고 흔들어 댔다. 항상 그렇듯이 베란다 문은 열어둔  침대 위에 모기망을 설치하고 잤던 지라 준희는 모기망 안에서 베개를 흔들어 대며 온갖 몸짓으로 소리를 질러 댔으니,  모습을 누군가 봤으면 얼마나 우스웠을지 상상이 간다.


 원숭이는 상대가 여자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힘이 없을 거라 무서워할 필요가 없으니 준희가 아무리 소리 지르고 온갖 몸짓을 해도 열심히 그 모습을 즐기며 태연하게 남은 바나나까지 하나하나 여유롭게  까먹은 뒤에 유유히 나가 버렸다.


나중에 들으니, 원숭이들은  건너 남자 기숙사에는 절대  간다고 했다. 그들은 이미 상대가 만만한 여자들만 사는 기숙사임을 알고 여자 기숙사에만 온다는 거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방  방으로 옮겨 다니며 아침 식사시간에 받아 나중에 먹으려고  바나나를 훔쳐 먹으며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래서 외출할 때는 원숭이가 들어올까  반듯이 베란다 문을 닫아 잠그고 나가야 한다. 여학생들은 복도에서 원숭이와 마주치면 소리부터 지르기 바빴다.           



-푸자(puja)- 

인도하면 빼놓을  없는 것이 축제다.

인구 14억으로 세계 1위이며 국토면적이 남한의 33배에 달한다.

언어는 122개나 되며 방언등 기타 언어가 1500 개나 된다. 인도정부 공식 공용어는 힌디어와 영어다. 힌디어는 주로 델리 지역에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같은 인도인이라도 영어가 아니면 서로 간에 대화를  수가 없다. 출생지역에 따라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운데 국가에서 공식 지정한 언어만 22개다. 인도 화폐에도  22개의 언어로 화폐 해당 액수가 적혀 있다. 뿐만 아니라 위급한 국가 재앙이 터지면 22 언어로 같은 내용의 뉴스가 라디오에서 계속 나온다.

가운데 여러 언어로 화폐의 액수가 표시됨

 

인도의 종교은 힌두교다. 인도 신화에 기반을  다신을 믿는 종교이니  신들의 숫자가 인도 인구보다 많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 그들 신을 기리는 축제는 거의   열두  열리고 있다.  가운데서 3  홀리(Holy) 축제와 10 가을에 열리는 디와리(Diwali) 축제가 가장 크다. 축제는 휴일이므로 홀리 축제 2 3일이나 디와리축제 3 4일은 일하러 직장에 나가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지역에서  사람들이 자기네 지역  축제라고  근무를  한다. 인도에  있는 한국 상사들은 인도 직원들이 툭하면 오지 않는 바람에 너무 힘들다고 불평하는 말을 여러  들었다. 인도에서 사업을 하려면 그걸 감수해야 한다. 인도 전통문화이니 직장 상사라도 어떻게  수가 없지 않은가.    

 

기숙사에서도 신이 태어나는 날이거나 영적인 어둠으로부터 내면의 빛을 비추어 준다는 디와리 축제날에는 몇몇이 모여서 새로 샀거나 깨끗하게 세탁한 사리를 차려입고 누군가의 기숙사 방에 차려놓은 제단에 신상과 꽃으로 장식하고 색가루로 장식한 멋진 문양 앞에서 의식을 치른다. 이런 의식을 푸자(puja)라고 한다. 신에 대한 경배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준희도 그들과 함께  신들에게 공손히 꽃공양을 올리고 의식을 함께 했다. 물론 신들의 신화 속에서 어려서부터 배우고 성장한 그들이 느끼는 절절한 감정은 전혀 와닿지 않았지만 준희는 인도에 살고 있는 이상 그들과 함께 그들의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인도 요기들-

준희는 요기도 만났다.

길에 가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어 헤집고 들어가 보니 한가운데 수염이 길고 하얀 인도옷에 머리도 위로 올려 묶은 요기가 앉아 있고 뭔가 힌디어로 설법? 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양인이 얼굴을 내밀고 쳐다보니 눈에 띄었나 보다. 그는 준희를 지목하며 본인이 원래 살고 있는 남부지역으로  한번 와달라고 한다. 그가 힌디로 말을 하면 그의 제자인 듯이 보이는 요기가 열심히 영어로 통역을 해서 알려준다.


내용 인즉은  한번 방문하면, 몸이 연기가 되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고 느꼈다. 몸이 연기가 되어 병으로 들어가는 것은 묘기일 뿐이지 그게 성자가 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래도 준희는 감사 인사를 깍듯하게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경지에 그가 정말 도달했다면  자체가 훌륭하다.  결실을 얻도록 그가 겪어 왔을 지난한 인내와 꾸준한 학습의 피나는 노력이 아닌가 말이다. 그것만 해도 존경을 표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생을 살아가면서  가지 일에 몰두하여 목표한 결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것이 뭐가 되었건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라면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인간 승리가 아닐  없기 때문이다.  

 

준희의 인도생활은 이제 반은 인도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익숙해 갔다. 음식도 푸자도 그리고 인도 옷도 스스럼없이 잘도 입고 다녔다. 사리는 입기가 너무 불편하므로 푸자 때만 입었고 주로 푼자비 드레스라고 해서 순면의 몸빼 같은 바지 위에  웃옷을 입었는데 거기에 반듯이 가슴을 가리는  스카프를 둘렀다.


인도 북부 지역인 푼잡(punjab)에서 주로 입었다 해서 푼자비 드레스라고 하지만 정식 명칭은  넓은 바지를 살왈(shalwar)라고 하고  상의를 꾸르띠(kurti)라고 한다. 여기에  스카프를 가슴에서 한번 돌아 멋진 휘어짐을 만들고 다시 뒤로 넘긴 것을 듀빠따(dupatta)라고 한다. 인도옷은 순면이므로 땀이 많이 나는 더운 지역에서는 정말 제격이다. 준희도  살왈 꾸르띠를 자주 입고 다녔다.  인도에   2년째로 접어드니 정말 스스로가 인도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융화가  가는  같았다.


그러나 인도 전역에서 일어나는 이해  되는 문화 현상들에서 뭐라 정의할  없는 의문의 꼬리는 여전히 준희의 마음속에 하나하나 쌓여 가고 있었다. 마치 20대에 고영순에게서 느꼈던 의문의 감정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담아가며 그 연결 고리가 결국 준희의 인생 방향으로 설정되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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