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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dhi kim Mar 25. 2024

인생의 큰 전환점들   

 -삶에 대한 허망함 그리고 항거?-

참선은 여전히 이어졌다. 

공부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준희는, 자연스레 한 학기 늦었지만 가을 학기에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준희는 그 짙은 감색 티셔츠와 얼룩덜룩 유한락스로 색 바랜 바지를 입고 다니는 건 여전했다. 식사도 잠도 제대로 충족되지 않은 상태로, 엄마가 주는 꿀에 갠 홍삼 한 컵씩만 들이키고 학교에 다니니 몸은 비쩍 말라 볼품없는 몰골에 걸음걸이도 정상이 아닌, 누가 봐도 혀를 찾을 몰골로 대학원을 다녔다. 


1970년대에  대학원에 간다는 것은 학문을 계속해서 교수가 될 꿈을 가진 학생이거나 혹은 돈이 많은 부잣집 사람이 여유로 다니면서 지식을 습득하고 싶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학원 입학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더구나 구두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대학원생은 거의 없었다. 


불교학과에 어떤 부유한 주부 대학원생이 준희가 얼마나 가난하면 저렇게 운동화에 얼룩진 옷을 일 년 열두 달 입고 힘없이 다니느냐면서 보약을 지어주겠다고 동급생한테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준희는 외부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렇게 까지 불쌍해 보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런 식의 생활은 학사편입한 3학년부터 졸업 후 대학원 2년 내내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1년마다 한 번씩 가슴에 품었던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조금씩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 하는 생각에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준희는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방법이 옳은 지 그른 지 점검을 받고 싶어졌다.

 

준희는 광주에 계시는 고익진 교수님에게 찾아가 공부한 이야기를 했다. 교수님은 전라도 광주에 자그마한 절을 가지고 계시며 부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준희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도 못 풀겠으면 여기 절에 와서 지내며 공부해 봐라." 한다. 

교수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가득했던 준희는 그래야겠다고 다짐하며 서울 집으로 왔다. 그날 밤 꿈을 꾼다. 내용은, 그리로 가면 안 된다는 일종의 암시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자 준희는 그만 광주에 가려던 마음을 접었다. 

 

그러던 중 불교계에서 참선하는 스님들에게 큰 신망과 공경의 대상이신 인천의 어느 큰 스님을 만나 상의를 하게 되었다. 송담 큰스님은 준희의 이야기를 다 듣고 말씀하신다.

 

너는 여자지만 참으로 근기(根器)가 대단하구나. 출가하라. 그리고 참선은 화두가 있어야 한다. 화두, 이뭣고? 를 들어라.”

준희는 다시 신심이 나서 그렇게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 또 꿈을 꾼다. 그 꿈의 암시도 광주 다녀왔던 날과 같은 메시지였다. 

 

준희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상하게 누구를 만나든 관련 꿈만 꾸고 나면 전날의 확신과 믿음이 물거품처럼 사라져서 그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기가 불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희의 참선 생활은 여전했다.

 

특히 준희는 저녁 석양 때가 되면 허무감이 몰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 참선 이외에 그 감정을 이겨낼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더욱더 절절하게 완전히 몰입해 들어갔다. 그야말로 선정(禪定) 그 자체에 들었다. 그 허무함이란 “내가 왜 사나?” 하는 물음이다. 이제 준희는 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과도 싸워야 했다. "도저히 살아갈 이유가 없는데 왜 살아야 하지?" 하는 물음이 그녀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저녁 석양 때가 되면 그 허무를 견디기 위해 예외 없이 가부좌하고 앉아 매일 선에 드는 것이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그런데 하루는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밖에 볼일 있어 나가야 하므로 준희가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부엌에서 분명히 손동작은 물에 손을 넣고 설거지를 하는데 단전에서 힘이 느껴지고 정신상태는 선정에 들어 있음을 감지했다. 그 시각이 해가 지는 일몰 때였다. 놀라웠다. 준희의 심신은 매일 그 시간이면 선정에 드는 습관으로 자동 저장되어 있던 것이다. 몇십 년 후에 준희는 그 현상이 '신경가소성'에 의한 작용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의 '알파'를 찾고 나서였다.      


-절절한 허무감에 대한 항거?-

드디어, 어느 날 준희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정말 못 찾겠으면 그만 죽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약국에 다니면서 수면제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는 의약분업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누구나 원하는 약을 의사처방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께는 미안하니까 결전? 의 장소는 다른 곳으로 결정했다. 언젠가 엄마가 경기도 어딘가에 산을 사두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주소는 알고 있었으므로 거기서 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사서 모아둔 수면제 약을 챙겨 들고 경기도 그 산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시골 기차역은 정말 한적하다. 역에서 내리니 저녁때가 되었다. 근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이 맛난 짜장면도 이제 끝이구나.’ 당시 짜장면은 아주 귀하고 맛난 최고의 음식이었다. 든든히 저녁을 먹고 준희는 주소지가 있는 곳을 향해서 결연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오랜만에 아주 가뿐했다. 

 

넓은 도로에 포장 안된 고운 흙이 덮인 길을 걸어가는데 어느덧 해가 뉘였 뉘 엿 저물고 있었다. 어디선가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길에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그 흔한 자전거도 다니지 않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데 한참을 걷다 보니 이제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서움이 왈칵 몰아친다. 


그래도 꾹 참고, 결행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가야 한다는 독한 마음으로 걸어가는데 어느 집 개가 아주 세차고 우렁차게 마구 짓어댄다. 그 소리가 마치 곧바로 튀어나와 물어버릴 기세였다. 너무 무서워 공포에 질린 준희는 그만 뒤로 돌아 역방향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허무감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공포에 질려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는 한 생각만 들었다. 어떻게 역까지 왔는지 마치 순간 이동 한 것처럼 역에 도착했다. 그 후로 준희는 다시는 그런 죽음 같은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준희의 참선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허무감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아서 더욱더 더욱더 몰입해 들어갔다. 준희의 집은 한옥이 두 채로 아랫채에는 부모와 식모가 살고 계단으로 올라오면 윗채는 준희와 큰아버지 손자인 조카 재익이가 서울에 와 집안일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방이 준희 옆방에 있었다. 준희의 참선은 날이 갈수록 깊어가니 몸은 꼬챙이처럼 말라가고 일체 다른 외부 생활은 물론 친구와의 교류도 없으니 학교와 집 그리고 선정, 이게 준희 생활의 전부였다. 


그런 모습을 본 불심 깊은 엄마는 딸 준희를 마치 큰스님을 모시듯 했다. 아랫 채에서 윗 채로 딸을 보러 오거나, 꿀에 갠 홍삼을 들고 올라오다가 마루에 앉아 선정에 잠겨 있던 딸 준희에게 두 손 모아 합장하며 절을 했다. 엄마는 나중에 이런 말을 전했다. 

 

하루는 누군가가 집에 찾아왔다고 한다. 나가보니 어느 여자가 자신은 신을 모시는 사람인데 그 신이 여기 집을 가리키며 찾아가 보라고 해서 왔다고 했단다. 엄마는 놀라서 "우리 딸이 불교 공부를 해서 방에 불교경전이 가득하니 그래서 그랬나 보다"라고 하며 돌려보냈다고 했다. 아마도 딸의 맑은 기운이 누군가에게 미쳤을 거라는 해석을 엄마는 한다

 

드디어 대학원석사 논문을 쓰고 졸업이 다가왔다. 준희는 석사 논문을 들고 인도철학과에 가서 자주 강의를 듣던 원 의범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은 그 옛날 인도로 유학 가서 정통 인도철학을 공부하고 오신 유명한 분이다. 논문을 쭉 읽어 보시던 교수님은 준희에게 인도로 유학을 가면 어떻겠냐고 권유하신다. 한 번도 유학이란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그것도 외국에 나간다는 건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던 준희에게 던져진 이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았다. 


때는 1981년이었으니 해외여행이란 것이 흔한 것도 아니었으며 더구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당시 백인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미국인이라고 알고 있던 시대였다. 마찬가지로 동양인을 해외에서는 모두 일본인이냐고 물었던 때였다. 일본의 위상이 컸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한민국을 설명해도 못 알아 들었던, 백인이라면 무조건 미국인 이어야 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였다. 

 

집에 와서 상의하니 아버지는 안된다며 반대, 엄마는 찬성이셨다. 딸이 원하는 건 다 해주고픈 엄마였다. 나이 차이가 많은 오빠와 언니는 이미 결혼들을 해서 나가 살고 있었고 부모님과 집안일 도와주는 아주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준희도 부모님이 몹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로는 부처님의 나라인 인도에 가서 나도 석가모니처럼 살며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 의범 교수님 지도아래 인도 델리대학교 불교학과에 신청서를 내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나 드디어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1983년도 5월 나이 3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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