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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dhi kim Apr 01. 2024

인도로 유학 가다

--문화적 충격--

-유학기-

태어나서 처음 비행기를 탔다. 인도 직행 비행기가 없어 태국에서 1박 경유하고 다음 날 인도로 출발하는 노선이다. 태국은 몹시 덥고 습해 가게 상인들이 웃통을 거의 입지 않고 있었다. 준희는 참으로 상스럽다고 느꼈다. 어떻게 남자라 해도 저렇게 훌훌 벗어젖히고 살 수 있을까. 그 상스럽다는 감상은 잠시 호텔 바깥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다가 이해로 바뀌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더위! 생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습한 날씨에 40도를 넘나드는 폭염이었다. 


과일 가게에 향이 아주 좋은 처음 보는 과일이 있어 사 들고 호텔로 돌아오며 프런트에서 칼을 빌려 달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 과일을 먹으려 한다고 하니 그럼 여기서 칼을 사용하고 돌려 달란다. 그 향 좋은 과일을 보여주니 망고라고 한다. 칼로 사과처럼 반을 싹둑 자르려고 하니 프런트 모여있던 사람들이 깔깔 대고 웃기 시작한다. 망고는 씨가 한가운데 길게 누워 있어 그렇게 자르는 게 아닌 거였다. 

 

하룻밤 경유이니 샤워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늘 하던 습관대로 벗은 옷을 두려고 하니, ‘아차~ 난 이제 집으로 가는 게 아니지….’ 준희는 화두에 매달리며 잘 먹지도 충분한 수면도 취하지 못해 늘 몸이 허약해서 알부민 주사를 수시로 맞지 않으면 안 되었고 머리 한번 감고도 힘이 들어 쉬어야 하는 허약체질이었으니 속옷 한번 손으로 빨아 본 경험이 없었다. 


엄마는 그런 준희에게 당시, 국민 영양제 원기소처럼 홍삼으로 만든 정제약 수십 병을 챙겨 주었으며 인도 가서 기운 없을 때 주사 맞으라고 7 백만 원의 거금을 챙겨 주었다. 그 돈은 인도 유학생활 5년을 지나고 학위 논문 낸 후 유럽여행까지 마치고도 남을 정도의 액수였다. 엄마는 돈을 배에 차고 다니라며 배에 두르는 무명으로 만든 전대까지 만들어 채워 주었다. 

 

그날 밤 호텔에서 처음으로 준희는 다짐한다. '나는 홀로 집을 떠나 왔으며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감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켰다. ‘난 이제 혼자 살아야 한다. 혼자다. 잘 해내야지!’ 다음 날, 드디어 인도에 도착했다. 공항에 내리니 너무 후끈거려 어디선가 불이라도 났나 보느라 앞 뒤로 돌아보았다. 불은 안 났지만 날씨 때문에 그렇게 더운 거라는 걸 감지하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섭씨 45도. 델리는 45도라고 해도 습기가 태국처럼 많지 않아 기분 나쁜 끈끈함은 없었다. 사람들도 뜨거운 태양으로 몸에 뭔가라도 걸치고 있어 태국처럼 웃통을 벗어젖힌 맨몸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살갗이 타버릴지도 모르니 될수록 피부가 햇볕에 노출되는 걸 막아야만 했다. 델리는 덥지만 습도가 낮아 인도의 수도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습도가 낮으니 햇볕만 가리면 그래도 견딜 만했다.

 

공항에서 스쿠터를 타고 네루 대학교 교수 아파트 주소를 내밀며 가자고 했다. 그 주소는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서교수가 네루대학교에 방문교수로 있는 집 주소였다. 원교수님 소개로 교수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결이 되어 일단 방문하면 그 댁에 며칠 머무르기로 했던 거였다. 아파트로 찾아가니 아무도 없다. 순간 막연했다. 


영어소통도 잘 안되고 더구나 스쿠터운전자는 인도 힌디어만 할 줄 아니 손과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다. 길거리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햇볕에 그을린 듯 진한 구릿빛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모습에다 책에서나 봤던 낯선 사리를 입고 있었으며,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수염이 진하고 무섭게 보이는 사람들뿐이니 준희는 주눅이 들어 도저히 혼자 기다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지경이었다. 


서울에서 가져온 짐꾸러미에서 녹음기 테이프를 꺼냈다. 스쿠터 운전자에게 뇌물로 주기 위해서다. 당시 인도는 그런 종류의 공산품이 아주 귀한 때라 그 테이프는 상당한 가격으로 거래될 수 있는 상품가치가 있던 거였다. 이런 종류의 팁은 모두 원교수님이 전수해 주신 거였다. 

 

스쿠터 운전자에게 그 테이프를 선물하면서 서교수가 올 때까지 함께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난생처음 밟아 본 땅 인도에서 스쿠터 운전자는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드디어 그가 왔다. 서 교수님은 편지로만 주고받았을 뿐 얼굴을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얀 긴 수염을  휘날리는 멋진 분이었다. 


그는 인도에서 5월이 가장 더운 여름이라 입학 허가서를 받았어도 몇 달 있다가 오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어찌 왔느냐고 했다. 그 편지는 못 받고 온 거다. 당시 메일도 전화도 모두 소통이 어려운 때이니 편지는 열흘은 지나야 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일단, 생면 부지의 나라에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나니 너무나 좋고 마음이 놓여 준희의 마음은 그저 감사함으로 그득했다.

 

그의 아파트는 방이 3 개 있었고 그는 혼자였다. 방 침대에 누우니 바로 몸 위 천정에서 대형 큰 선풍기가 세차게 돌며 소음을 낸다. 처음 보는 광경이다. 시끄러워 껐으나 도저히 더워서 잠을 못 자 다시 켜고 그래도 더워 할 수 없이 창문 방문을 모두 열어 제 끼니 비로소 견딜 만했다. 피곤과 공포에 절었던 하루를 꿀잠으로 보내고 아침이 되었다. 

 

목욕탕에 세수하러 들어가니 그의 속옷이 대야에 담겨 있었다. 준희는 생각한다. ‘이 옷을 빨아야 하나?… ‘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멀리 타국에서 친척도 아닌데 신세를 지고 있으니 빨아야 할 것 같았다. 이 넓은 천지에 갈 곳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가. 


준희는 열심히 손으로 문질러가며 그 속옷을 빨았다. 평생 한 번도 본인 속옷조차 제대로 빨아본 적이 없는 준희가 남의 속옷을 세탁하고 있는 거다. 그러나 준희는 오히려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이제는 내가 누구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야 하니 잘~, 헤쳐 나가야지’ 마치 한발 한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까짓 처음 본 남자의 속옷을 빨아주는 것쯤이야.... 모든 걸 잘~ 해내야지.' 그분의 속옷을 베란다 줄에 널었다. 교수는 거기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인도 델리의 5월 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네루 대학과 델리 대학의 거리는 스쿠터로 거의 2시간가량 소요되는 먼 거리였다. 네루대학이 있는 쪽은 한국의 강남 같은 곳이다. 각 대사관 들과 부유층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고 델리대학교 본관이 있는 곳은  강북 같은 곳이다. 학과 등록도 하고 기숙사도 신청하는 등 행정 절차가 남아 있어서 네루 대학과 델리 대학 사이를 오가는데 며칠이 지나갔다. 다녀오기만 하면 몸이 땀에 절어 있어 물을 엄청 마셔 댔다. 

 

인도의 물은 반듯이 끓여 마셔야 하므로 교수가 열심히 물을 끓여 놓으면 내가 다 마시는 꼴이 되었다. 물을 끓이면 하얀 재 같은 것이 주전자 바닥에 고이는 것을 보며 아마도 강에서 태우는 시신의 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목이 너무 마르니 밥 먹을 때도 물에 말아먹게 되었다. 그럴 적마다 눈치가 보였다. 


그가 해주는 밥이 미안하고 열심히 끓여 놓은 물을 내가 많이 마셔대는 것도 미안하고 그의 집에 머무르는 것도 한없이 미안하고 죄송했다. 그런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학 본부까지 일 보러 하루 4시간씩 뜨거운 바람을 맞아가며 달려야 하는 스쿠터에 시달렸다 돌아오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인도의 행정은 그저 마냥 기다리는 것이 다반사라서 언제 델리 대학교 기숙사에 방이 잡힐지도 모르는 처지였다.  


3일째 되던 날, 교수가 말한다.

“웬 도사가 와서 밤에도 문 열어 놓고 자고 물은 혼자 다 들이켜고…” 

 

교수는 수염이 하얀 나이 드신 분 같아서 남자라는 생각조차 못한 준희에게 그의 이 말은 몹시 놀라웠다. 그리고 죄송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뭐라고 답변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준희에게는 교수님 댁 이외에 다른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교수가 제안한다.  대학 기숙사에 입사하기 전에 대학 근처에 있는 다른 숙소로 일단 들어가라는 거였다.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다. 대학 기숙사가 아니라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이 무슨 고마운 곳이 또 있는가. 

 

교수는 준희를 데리고 각국 대사관이 즐비한 뉴델리 중심에 있는, 외국인들이 주로 머무는 숙소로 데리고 갔다. 거기는 티베트 불교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큰방 하나에 6개의 침대가 있는 여자 숙소와 남자를 위한 방이 각각 있었다. 공동으로 살아야 하는 일종의 게스트 하우스 같은 곳이었다. 그래도 거리상 네루 대학보다 델리대학에 다니기는 가까웠으며 아침도 해결할 수 있으니 좋다. 이제 숙소는 교수댁에서 티베트 게스트하우스로 옮겨졌다.  


1983년도에 동양에서 온 한국인 준희는 그때부터 엄청난 문화적 충격으로 매일매일이 놀라움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침대 6인 사용자 모두가 호주 캐나다 미국 등에서 온 서양인이었고 동양인은 준희 혼자였다. 샤워실에서 나오는 그들은 그냥 알몸으로 걸어 나왔다. 처음에 준희는 놀라서 눈을 돌리며 “아이 엠 쏘리”를 연발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오, 괜찮아. 문제없어”를 외친다. 어디 그것뿐이랴. 남자친구가 들어와서 침대에서 스킨십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거의 매일 반복되는 불편한 광경이 한 달 정도 지나면서 준희는 충격과 놀라움을 지나 서서히 그 낯선 광경에 익숙하기로 했다.

 

 근처에는 한국 대사관이 있었다. 비자 때문에 한국대사관에 방문했다가 어디 머무느냐는 영사의 물음에 주소를 말하니 바로 근처에 자기 집이 있으니 언제 한번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한다. 1980년대는 외국에 있는 대학에 박사과정으로 들어왔다는 의미는, 즉 한국에 돌아가면 교수가 된다는 걸 의미했다. 영사는 앞으로 교수가 될 사람이니 집으로 식사초대를 하겠다며 반 농담조로 말했다. 그런데, 드디어 그 식사초대 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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