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유실이 있나요?

by silvergenuine

지금은 11살인 둘째 강별이의 단유 후 모유수유실은 나의 안중 밖이었다.

휴대폰이 있으면 공중전화부스 위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수유를 하거나 기저귀를 갈 일이 없으니 어딜 가든 수유실이 있거나말거나 상관이 없었다.


그렇게 까맣게 잊었던 수유실이 9년 만에 다시 필요해졌다.

9년의 공백 후 다시 찾은 수유실은

시대에 따라 진화한 곳이 있는가하면

겨우 구색을 맞춰 놓고 이마저도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는 방치된 곳들도 있었다.


새로이 수유실을 이용한 경험을 나열하자면...


-친정에 갈 때마다 자주 들르던 고속도로 휴게소 모유수유실이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야 인지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수유실을 찾아 이용하려니 새삼스럽고 설레기까지 했다.

가림막이 잘 되어 있고, 수유쿠션도 있었으며, 기저귀 갈 때 아이가 집중할 수 있도록 천장 모빌도 달려있었다. 필요한 사람을 위해 1회용 기저귀와 물티슈도 비치되어 있고, 전자레인지도 있었다. 휴게소 이용객 중 몇 안 되는 아기 손님을 위해 이만한 공간과 정성을 들여준 것이 따뜻했고, 아기 키우는 부모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것 같아 힘이 나고 감사했다.


-구에서 운영하는 도서관 영유아자료실이 있는데, 그 한켠에 가벽으로 모유수유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수유소파와 기저귀 갈이대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한 쪽 구석에는 도서관 짐들까지 쌓여있어서 직원들이 이 공간을 무심하게 다룬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유아자료실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대형마트 수유실은 가림막, 전자레인지, 수유쿠션, 기저귀 갈이대가 있었다. 수유쿠션은 신생아 시기에는 꼭 필요한데 아기가 어느 정도 기대 앉을 수 있는 백일 이후에는 크게 필요하지 않다. 꼭 필요하면 쓰겠지만, 꼬질꼬질하면 사용이 꺼려진다.


-집근처 대공원 수유실을 9년 만에 이용했는데,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이 꺼져있어서 관리직원께 말씀드리니 에어컨을 처음 켜본다고 했다. 수유실 이용객이 그렇게나 없나 싶어서 놀라웠다. 출산율의 감소 때문일까, 모유수유를 하지 않아서일까?


-아무래도 수유실의 끝판왕은 백화점이겠지? 10년 전에 찾은 백화점 수유실은 관리 직원이 따로 있고 요청하면 기저귀도 1장씩 제공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최근에는 아직 이용해보지 않았다.


얼마 전 봉화 청옥산 휴양림에 갈 때 차에서 두 시간 가까이 낮잠을 자던 꽃봄이가 영주 ic를 지날 때 쯤 잠에서 깨어 줄기차게 울었다. 그런다고 운전 중인 차 안에서 안아줄 수는 없는 일, 급히 지도에서 정차할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영주 하나로마트가 가까이 있어서 급히 그 곳으로 들어갔다. 카시트에서 내려 안아주니 바로 울음을 그쳤지만 아직 1시간을 더 가야하는 거리라서 수유를 해야했다. 마트 입구 옆 까페에서 수유가리개로 가리고 수유를 하려고 생각했는데, 무더운 날씨에 지역 어르신들께서 좌석을 가득 채우고 피서 중이셨다. 마트로 들어가서 아기를 안고 두리번거리다 직원에게 문의했다.

"혹시 여기 어디 수유실이 있나요?"

"아, 수유실은 따로 없는데, 3층에 직원회의실이 있어요. 거기서라도 수유하시겠어요?"

"앗, 그래도 될까요?"

"네, 제가 같이 가드릴께요, 따라오세요."

너무나 친절하게 안내해주시며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기를 향해 웃음을 지으셨다.

"아이고, 배가 많이 고팠어? 어떡해, 좀만 참아. 아고, 예뻐라"

"그래도 안아주니 그쳤네요, 많이 컸나봐요. 바쁘실텐데 감사해요."

그 분의 안내를 받아 생전 처음 농협마트의 직원회의실에 가보았다. 회의실 겸 직원 휴게실로 쓰이는 그들만의 공간인데 낯선 외부인인 나와 아기를 경계없이 들여준 것이 너무 감사했다. 아기 키울 만한 세상이구나!

좋은 기억으로 남은 영주하나로마트 회의실에서 바라본 전경

그런데 다음날, 아이들과 찾은 태백안전체험관에서는 상반되는 경험을 해야했다.

첫째와 둘째가 아빠와 체험을 다니는 사이, 나는 품 안에 꽃봄이를 재우며 까페와 로비에서 기다렸는데

낮잠에서 깬 꽃봄이가 보채기 시작했다. 안내센터에 수유실을 문의하니 지하1층에 기사휴게실 겸 수유실이 있다고 했다. 아이가 보채는 통에 대충 알아듣고 엉뚱한 곳을 찾아갔다가 다시 한번 문의를 해서 겨우 수유실을 찾아냈다.

반가운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깜깜하게 불이 꺼진 방에 아저씨 두 분이 주무시다가 아기 우는 소리에 몸을 일으키셨다.

"앗, 아니에요, 계속 주무세요."

깜짝 놀라 문을 닫아주고 황급히 로비로 돌아왔다.

로비에 의자가 많아서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유가리개로 가리고 수유를 하기로 했다.

적당히 냉방 중이었지만 수유 가리개를 씌우고 수유를 하면 아기가 그 안에서 너무 더워 땀에 흠뻑 젖는다. 그렇다고 화장실에서 수유를 할 순 없다. 오가는 사람들 앞에 시원하게 내놓고 수유를 하고 싶지도 않고... 땀에 젖을 아기가 안쓰러웠다.

마침 체험장소를 옮겨 가던 남편과 아이들을 마주쳤다. 남편이 반갑게 다가오는데 그를 보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서러움 때문이었을까? 남편이 놀라서 왜 우냐고 자꾸 묻는데, 뭔 일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마음을 수습하고 생각해보니 그 곳이 너무하긴 너무했다. 기사휴게실 겸 수유실이라니... 대다수의 남자 기사님들과 대다수의 아기 엄마들이 같은 공간을 공유하라고? 어떻게 그런 발상을? 겹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나?

체험학습을 많이 오는 곳이니 버스 기사님들이 쉴 곳도 있어야 하고, 가족 단위의 체험객이 많으니 모유수유실도 있어야 하는 곳이 맞다. 근데 그걸 한데 뭉뚱그려 '옛다, 알아서들 사용하시오'라고 했으니 그렇게 운영하는 그 곳의 거칠음에 상처를 받은 것이다. 조금만 더 섬세하게 배려해주었다면, 그 넓은 로비 한 켠에 가벽으로라도 수유 공간 하나 마련해두기만 했어도 아기 엄마가 서러울 일은 없었을 텐데.


점점 줄어드는 출산율만큼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가족도 줄어들기에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까?

말로만 출산 장려하지 말고 아기 손님이 찾아올 때 잘 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신경써주면 좋았을텐데. 아기와 가는 모든 곳이 그럴 순 없더라도 적어도 공공기관, 대형 건물에 어느 정도 아기가 편안하게 먹고 기저귀도 갈 수 있는 공간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아기를 키우는 가정이 마음 놓고 방문할 수 있는 환경이 많아져야 진정한 의미의 아이 친화 사회라 할 수 있다. 이런 환경이야말로 아기를 키우는 부모에게 '힘내세요!'하는 진짜 응원이 된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25화빌런이 될 순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