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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고모 생각

by silvergenuine

이번 주말, 무더위를 뚫고 경북 선산에 있는 친정에 다녀왔다.

8월 말의 늦더위라고 쓰려다 아직도 한창인 이 더위의 끝이 보이지 않아 무더위로 고쳐적었다.

열대야만이라도 이만 물러가면 좋으련만, 시골의 밤공기도 후덥지근하여 밤새 에어컨 가동을 멈출 수 없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닭들은 새벽 4시만 되어도 꼬끼오 울어대며 부지런함을 뽐낸다.

평생 해온 농사일로 허리, 어깨, 무릎 성한 데가 없는 엄마도 해가 뜨기 전에 마당의 일을 보러 나가신다.

여름엔 아침 9시만 되어도 볕이 너무 뜨거워 마당에 나가지도 못한다고 하시며 새벽부터 아침까지의 시간을 틈타 닭과 개들을 챙겨주고, 고추며 참깨, 들깨, 콩 등을 가꾸고 거두신다.

8월 말이면 땅콩을 캐는 시기라 나는 내가 먹을 땅콩을 뽑고 따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찍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새벽 5시에 수유를 하고 다시 잠들어서는 동창에 해가 밝아오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엄마는 간밤에 한 잔한 사위들을 위해 콩나물국을 끓이며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계셨다.

부엌으로 선풍기를 틀어드리고 시계를 보니 7시였다. 주말 기상 치고는 이른 시간, 하지만 시골에서는 이미 늦은 시간.


햇빛과 모기 때문에 긴 팔, 긴 바지로 무장을 해야하나, 땀에 젖기 싫어 반팔, 반바지, 슬리퍼에 밀짚 모자만 쓰고 마당으로 나가 땅콩을 뽑았다.

가뭄으로 흙먼지가 일었지만, 땅콩알은 적당히 들어차있었다. 엄마가 수돗물이라도 퍼주고, 집안일하며 나온 허드렛물을 날라다 뿌려주신 덕분이다.


화단 주목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땅콩을 따기 시작했다. 혼자서 땅콩을 따다보니 어릴 적 우리 마실고모 생각이 났다.

그 땐 마실고모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어른들을 따라 그렇게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고모가 안동네(*동네(마을)의 안쪽. 안동시 아님)에 살아서 마을의 사투리인 '마실'을 붙여서 마실고모라고 부른 것이었다. 우리집도 원래는 동네 안에 있었는데, 내가 4살 때 마을 외곽에 있는 밭 옆에 집을 지어 이사를 나오면서 상대적으로 고모는 마실고모가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마실고모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고모 혼자 사시며 우리가 안동네에 살던 때부터 엄마아빠를 대신해 우리 삼남매를 한번씩 봐주시곤 하셨다.

이사 온 우리집 옆에는 이웃의 땅콩밭이 있었다. 우리 고모는 그 밭의 땅콩 수확이 끝나고 나면 땅콩이삭줍기를 하러 오곤 하셨다.

내가 여섯 살 때쯤 마실 고모가 허리에 두른 보자기에 땅콩 이삭을 가득 주워서 우리집에 오셨다. 나의 그 기억 속에 계절은 없었는데, 오늘 땅콩을 따며 생각하니 그 때도 무더운 8월이었겠다. 우리집 단칸방에 엄마와 마주 앉아 물을 마시며 삶의 푸념 같은 이야기를 하시는데 여섯 살 내 눈에 고모의 모습이 너무 고단해보였다. 틀니로 합죽거리는 입,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속상했던 이야기, 지쳐보이는 몸. 힘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부끄럽지만 용기를 내어 살그머니 고모 뒤로 다가가 어깨를 주물렀다.

"아이고, 야가 내 어깨를 주무른다! 살모시 뒤에 와가 내 어깨를 주무른다 아니가!"

미처 제대로 주물러드리기도 전에 어찌나 큰 소리로 반색을 하시는지, 나는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고 뒷걸음을 쳤다. 그래도 고모가 웃으시니 내 기분도 좋았다. 고모는 주워오신 땅콩 이삭에서 한 바가지를 덜어놓으시고 가셨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시절 내가 먹던 땅콩은 제대로 알이 찬 땅콩은 드물었고, 쭈그렁망탱이 땅콩이 많았다. 손힘이 달려 이로 깨물어 땅콩을 까먹곤 했는데, 어릴 때부터 먹어서인지 지금도 생땅콩을 좋아하고 잘 먹는다.

땅콩을 사먹으면 알이 꽉찬 알짜들만 보게 된다.

땅콩 농사를 지어 먹으면 알짜도 먹고, 물짜도 먹는다.

*알짜:여럿 가운데 가장 중요하거나 훌륭한 물건 <->쭉정이(땅콩에서는 물짜라고 부른다)

땅콩 이삭을 주으면 알짜는 드물고 물짜가 많다.

어릴 때 고모가 이렇게 주워다준 땅콩 이삭만 보아서 난 땅콩은 다 그렇게 쭈글쭈글한게 많은 줄 알았는데 직접 밭에서 기른 땅콩을 먹어보니 알이 꽉찬 생땅콩이 고소하고 쌉싸름하다. 그리고 물짜 땅콩은 쭈글쭈글 마르기 전에 먹으면 하얗게 차있는 꼬투리살이 참 달고 시원하다.

고소한 알짜와 시원한 물짜 땅콩의 맛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추수가 끝난 땅콩밭에서 이삭을 주워 땅콩맛을 보셨던 우리 고모. 마실고모의 삶도 그런 맛이었을까.


엄마에게 들은 바로는 마실고모도 원래는 결혼을 하셨더랜다. 갓난 아기를 돌보기 위해 호롱불을 켜고 밤을 보내는데 그 호롱불이 넘어가 불이 났고, 그 불에 아기를 잃으셨다 했다. 그 일로 시댁에서 쫓겨나 혼자 살게 되신 걸로 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원통하셨을까. 마실고모가 그럼에도 살아내신 그 세월을 내가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할머니가 시킨 모진 시집살이에 한이 맺혔던 우리 엄마는 분가하고 안동네로 간 뒤 혼자 사시던 마실 고모와 이웃이 되면서 그 분의 고운 마음씨와 외로운 처지에 더 깊은 인연을 쌓으셨다. 고모 환갑잔치도 해드리고, 중풍으로 누우셨을 때는 간병도 하셨다. 그런 어른들의 일은 내 기억 속에 없지만, 한번씩 심심할 때 언니랑 둘이 놀러가곤 했던 고모집의 구조와 화장실 옆 살구나무에서 진액을 모으던 기억, 전기밥솥에 정강이를 데여 고모가 된장을 발라줘서 남은 흉터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다.


마실고모는 내가 여덟 살 때 돌아가셨다. 그 장례의 과정도 내게는 아무 기억이 없다. 엄마에게 마실고모 안 오냐고 물으니 돌아가셨다는 대답을 들었었고, 자손이 없으니 화장을 했다고 했다. 그 시절만 해도 부모를 화장하는 일은 불효로 여겨졌었기에 화장했다는 말에 안타까움과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함께 느껴졌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땅콩을 따며 문득 마실고모를 떠올린 나.

고모가 내 기억 속에 계시다는 게 고모의 외로운 인생에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어깨 너머로 내가 쓰던 글을 훔쳐보던 큰 아들이

"엄마 정강이에 된장 흉터가 남아서 좋아? 마실 고모를 기억할 수 있어서?"

하고 물어보았다. 사실 이 흉터를 보며 '화상에 된장을 바르면 안 된다'는 교훈을 되새기곤 했었는데, 아들의 질문을 받고 보니 이 또한 고모와의 기억이었다. 이젠 이 흔적도 애틋하게 품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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