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남편을 향한 서든어택

출근이 쉬운지, 육아가 쉬운지는 결국 핵심이 아니었다

by 솔직킴

둘째 아이를 가지며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아이 둘을 양육하는 것도 다시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부모님 댁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집을 구했다. 부모님과는 가까워졌지만 나와 남편은 직장과의 거리가 좀 멀어졌다. 그래도 나는 회사가 공덕이라 지하철로 한번에, 35분 정도면 갈 수 있어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회사가 양재에 있는 남편은 출근길 1시간 40분, 퇴근길 2시간을 길에서 보낸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이제야 와닿는다는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경기도에 살고 있다.


출근길을 붐벼서 가게 되면 아침부터 너무 지치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집에 일찍 오고자 남편은 출근시간을 당겼다. 새벽 5시 50분에 지하철을 타러 가는 그의 간단한 아침식사를 챙기고 배웅을 하려 나도 5시 30분이면 눈을 뜬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배웅을 하고 첫째가 일어나기까지 책도 읽고 밀린 드라마도 보는 새벽시간이 좋았다. 하루가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둘째가 태어나고 나니 새벽 5시반에 시작하는 하루가 너무 길어서 힘들어졌다. 아이가 일찍부터 통잠을 잤기에 노는 걸 포기하고 조금 일찍 자면 그렇게 피곤하지 않은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고 나면 하루가 너무 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머나먼 출근길을 떠나는 남편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을 텐데 알면서도 집에 남는, 아니 남겨지는 내가 더 가련했다.


둘째를 낳고 백일이 좀 되지 않은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일어나 남편의 아침 도시락을 싸는데 갑자기 화가 났다. 그날따라 아침에 일어나는 게 유독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날씨가 습하고 흐려서 인 것 같기도 하다. 그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자니 막막한 느낌이 몰아쳤을 수도 있다. 그러다 준비를 하고 나가는 남편이 툭 한마디를 던진다.


“아, 피곤하다. 출근하기 싫다.”


나도 모르게 이런 대꾸가 나왔다.


“짜증나네.”


거기에 더해 그를 노려봤다. 당황한 남편은 동공지진이 나며 물었다.


“왜 그래? 내가 뭐 잘못 했어?”


“하루 종일 집에만 처박혀 있는 사람도 있어! 난 지금 하루를 시작해서 언제 끝날지도 몰라.”


갑작스럽게 그를 쏘아붙였다. 남편은 씩씩 거리는 나를 토닥이며 “알았어. 일찍 올게.” 하고 차시간에 쫓겨 혹은 내 눈치를 보며 황급히 나갔다. 현관문이 철컥 닫히고 눈물이 핑 돌았다.


‘짜증난다’는 감정에서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걸까’로 생각이 옮겨가는 틈에 아기의 ‘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깨려는 아이 옆에 누워 가슴을 토닥였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느끼며 얼굴을 가까이 대어도 보고, 말랑한 손과 팔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아이 옆에 누워 있는 3분여 만에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차분해진 상태로 전날 남편의 퇴근 후를 떠올려보았다. 출근길보다 더 긴 퇴근길을 달려와 아이부터 안아 드는 남편의 얼굴은 지쳤지만 웃고 있었다. 매일이 길고 똑같아 지루하다고 했던 하루를 그는 나의 매일에 존재하는 이 말랑하고 따뜻한 아이를, 변함 없는 편안한 집을 그리워 하며 보냈겠구나 하는 생각에 닿았다. 그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지 난 몇 년 간 나 또한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느꼈던 지침과 그리움과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지는 안락함을 회상했다.


난 항상 출근과 육아 중 출근이 더 쉽고 편하다는 쪽에 손을 들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육아보다는 어렵고 고단해도 스스로 선택하고 제어할 수 있는 일이 백 배 천 배 나았다. 비록 길어진 출퇴근 길이지만 하루 종일 집안에서 아이를 돌보는 나보다 그가 더 편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투덜거리며 밖을 나서는 그가 얄미웠던 것 같다. 첫째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는 기간에도, 복직해 회사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도 육아와 일 중 하나만 택한다면 일을 하겠다는 것은 변함없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출근길에 솟구치는 짜증으로 남편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던 그날 아침, 말랑한 이 아기를 안고 만지고 껴안으며 문득 이런 호사가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의 이 아이를 눈으로 담고 손으로 만지고 돌보는 건, 분명히 귀한 일이다. 누군가 대신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 달라지는 것이 너무 많다. 나에게만 웃어주는 얼굴, 폭 하고 안기는 느낌, 괜찮아 한마디, 토닥임 하나에 일렁이는 아이의 마음이 이내 차분해지는 것은 이 때 내가 아이의 곁에 있었기에만 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출근이 쉬운지 육아가 쉬운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고, 그 일을 해야지만 알 수 있는 행복의 질감은 하는 자만의 것이기에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와 의미가 큰 일이라는 것이다.


절대 쉽지 않다. 자고 먹고 보고 듣는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고 싶을 때 할 수 없는 스트레스는 크다. 하지만 조금 참고 조정하다 보면 오히려 좋은 점을 발견한다. 아이에게 최적의 환경은 내게도 그러하다. 더울 땐 시원하고 추울 땐 따뜻하며 항상 안락하고 편안하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긴장하는 대신 말을 줄이고 표정으로 이야기하며 마음까지 고요해 진다. 작은 자극에도 충분한 만족감이 있다. 도파민에 찌들었던 삶에 도래한 구원의 시기일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가끔 나 대신 육아휴직을 쓰겠다는 그의 말이 진심이었겠구나, 싶다. 그 말에 ‘옳다구나.’ 했던 나 역시도 진심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기도 해서 그에게 조금 미안했다. 그 시간에도 두어 시간을 출근길을 달려 회사로 가 일상의 고단함을 마주해야 하는 그가 안쓰럽고, 그런 그에게 갑작스러운 화를 참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아침부터 미안해.’


메신저로 사과를 했다.


‘그럴 수도 있지. 일찍 올게.’


답장을 받고 또 눈물이 찔끔했다. 출근길부터 돌아오고 싶은 집, 그 집에 머무는 나. 이전에도 이런 날들이 꽤 여러 번 이었던 것 같은데, 이 날만큼은 ‘다시는 이렇게 서든 어택을 하지 말아야지’하는 다짐이 굳었다. 이 호사를 기억하며, 나는 호사를 누리는 중임을 기억하며 말이다. 나에게 또 이런 선택의 시간이 다가온다면 나는 여전히 일하는 삶을 택할 것이지만, 그것이 아이가 없는 채로는 아닐 것이다. 그가 없는 채로도 아닐 것이다. 좋은 파트너가 있기에 유지할 수 있는 삶이고 호사이다. 나는 호사를 누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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