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이 사는 곳
스위치가 꺼지고 켜지는 짧은 순간 같이 잠에서 깼다. 이른 아침에 들리는 닭의 울음소리. 나는 시골에 있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곳에 온 지 겨우 하루, 악몽은 도시에 두고 온 듯 진정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거실로 나가 미닫이문을 열었다. 곧 햇살이 더 밝아질 푸른빛의 시골 마당이 펼쳐졌다. 문을 닫으려던 손을 멈추고, 문을 열어둔 채 아침의 차가움을 머금은 거실 바닥에 몸을 뉘었다.
악몽 없는 아침의 시작.
맑고 신선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도시의 뜨거운 열기와 소음은 저 먼 곳 이야기 같았다. 아니, 저 먼 곳의 이야기이다. 문득 든 호기심에 나는 미닫이 문턱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었다. 새벽이슬이 신발에 촉촉하게 맺혀 있었다. 그 차가움에 졸음은 달아났다.
닭 울음소리는 분명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마치 바로 마당 한가운데에서처럼.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마당에 닭의 흔적은 없었다. 신경 쓸 일도,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이슬이 깨운 몸에 기지개를 켰다.
분주히 짐을 풀고, 해가 더 높이 뜰 때까지 집안을 둘러보았다. 낡았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전자레인지와 밥솥, 따뜻한 물이 나오는 깔끔한 화장실. 장롱의 빈자리에 옷을 정리했다.
먼지와 나무 냄새가 스며든 장롱의 구석, 아버지가 읽던 성경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신 지 오래지만, 여전히 가까이하기 어려운 존재다. 성경을 꺼내 읽는 대신, 나는 서울 목사님께 받은 성경을 조용히 같은 자리에 놓고 장롱을 닫았다.
시골의 아침이라고 해서, 서울에서 길든 습관을 버릴 수는 없었다.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즉석식품을 먹고, 커피포트로 끓인 커피 한 잔을 든 채 마당으로 나섰다. 마당 한쪽의 평상은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노트북과 책, 테이블로 쓸 밥상 등을 가져와 평상에 펼쳤다.
감나무 그늘, 햇볕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더위가 덜했다. 꽤 운치 있는 풍경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유혹을 이기지 못해, 집으로 달려가 짐에서 담배를 꺼냈다. 평상에 드러누워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의 숫돌을 굴려 불을 붙였다. 서울에선 이웃과의 다툼에 강제되었던 금연이었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는 달콤할 뿐이었다.
시골의 맑은 하늘 아래,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나의 연기가 구름과 하나가 되길. 담뱃갑에 적힌 문구를 소리 내어 읽었다.
‘흡연은 폐암을 유발합니다.’
서울이라는 지옥에선 유발할 수 없던 폐암. 시골은 역시 좋은 곳이다. 도넛 모양의 연기를 하늘로 올려 보냈다.
자세를 고쳐 앉은 나는 담배를 끄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노트북을 켜고 작업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또 다른 유혹이 고개를 들었다.
‘시골에서의 첫날인데, 굳이 일할 필요 있나?’
목사님의 말이 떠올랐다. 잊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끊어진 번역 계약이 한둘이 아니었다. 인공지능 덕분에 번역 아르바이트조차 구하기 어려워졌다. 노트북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은 돈 걱정으로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려고 시골에 온 건 아닌데. 그래도 집세는 안 내도 되니까.’
양반다리에 저리는 다리를 주무르고 있을 때, 평상 위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번역 업계의 친한 형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적응은 잘하냐? 공기 좋지?”
“적응은 무슨, 하루밖에 안 됐는데. 공기는 좋네.”
“목소리가 많이 밝아졌다. 딴 사람 같네.”
“그래서 뭐, 안부 물으려고 전화했어요?”
그는 머뭇거렸다. 불안한 기운이 느껴져, 천천히 라이터의 숫돌을 굴렸다.
“네가 번역 맡기로 했던 영화 있잖아. 그거, 다른 사람이 맡기로 했어.”
“무슨 소리예요? 형, 내가 그 일 얼마나 필요한지 알잖아요. 수입사도 내가 한다고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나 이제 영화 보고, 대본받을 준비까지 했는데?”
“수입사 회장 사위가 번역하기로 했대. 미안하다.”
얼굴 근육이 경련하듯 떨렸다. 선배가 전해준 나쁜 소식은 담배 연기로도 씻어낼 수 없을 만큼 쓰라렸다. 인공지능이 부자들의 일자리는 뺏지 않는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그는 미안한 듯 말을 이어갔다.
“미안하다. 내가 무슨 힘이 있겠냐. 회장이 그러겠다는데… 나도 네가 미국에서 살았고 실력도 좋다고 어필해 봤는데, 내 목줄도 날아갈 뻔했어.”
“…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나니, 노트북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노트북이 닫히는 소리가, 내 마음을 천천히 짓눌렀다. 담배와 커피를 테이블에서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저의 겸손한 삶에 빛을 허락해 주십시오. 주님, 가난에 허덕이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도를 방해하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어제 이사 온 청년인가 봐. 이 집이 부동산에 나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무튼 잠은 잘 잤고?”
일거리를 잃은 슬픔에 청승 떨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마치 자기 집에 드나들 듯 마당을 가로질러 평상 위에 앉았다. 그 누구도 내 집에 들어와, 내 앞에 앉기를 바라진 않았다. 웃으며, 그의 먼지 묻은 양말을 바라보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주름진 얼굴. 여든은 넘었을까? 오랜 기간 태양에 불탄 그의 검은 피부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예. 어제 들어왔습니다.”
“이런 작은 마을은 어떻게 알고 온겨? 여기서 젊은 도시 사람이 할 일이 있나?”
그의 목소리는 취조하듯 매서웠다. 나는 대충 장단을 맞췄다.
“번역 일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하든 어디에서 하든 상관이 없으니까요.”
“번역? 내가 일본어를 조금 하는데. 여기 마을에 일본어 잘하는 노인네들 많아. 뭐, 다 늙어 뒈져버렸는지 모르겠네?”
노인들이 늙어 죽었다는 농담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니요. 일본어가 아니고, 영어 번역이에요.”
“그려?”
그는 낮게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래도 여기 노인네들이 지랄 맞게 오래 살긴 해. 자네, 축복받은 곳에 올 거야. 여긴 백 살 가까이 된 노인들이 수두룩해. 넘은 사람도 있고, 주님이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동네라니까.”
“기도를 잘 들어준다고요?”
“그려. 주님하고 가장 가까운 곳이여 여기가. 자네도 나처럼 늙으면 알겠지만, 건강 말고 기도할 게 뭐 있겠어? 다들 건강하게 해 달라고만 빌지. 주님이 기도를 다 들어주시니까 이렇게 다들 지랄 맞게 오래 살지.”
하나님이 기도를 잘 들어주는 마을이라니. 그것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기도를 끊은 건 눈앞의 노인이었다.
그는 여전히 웃으며, 내 몸을 훑어보았다. 나는 이제 그가 자리를 비켜주길 바랐다. 그는 불쑥 내 팔뚝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물었다. 굳은살 박인 그의 손가락의 감촉은 서늘하고 불쾌했다.
“이건 어쩌다가 다친겨?”
내가 있던 소대의 병사가 지뢰를 밟은 날, 그날 얻은 상처였다. 얼굴에 피가 뒤덮였던 그날의 냄새, 산속의 흙냄새와 화약 냄새가, 다시 코끝을 찔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멍청하게 서 있던 내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날처럼 멍하게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노인은 다시 집요하게 물었다.
“어쩌다가 다쳤냐니까?”
“군대에서 다쳤어요. 작업하다가.”
“아주 멋쟁이 총각이구먼. 나도 젊은 시절 군대에 있었지.”
그는 급하게 곧은 자세로 일어나더니, 빙의라도 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황국의 아들들이여! 천황 폐하를 위하여 진군하라! 제국의 이름을 피로 소리쳐라!”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마치 무덤 속에서 부활한 망령이 혀를 놀리는 듯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는 다시 평상에 앉았다. 내가 방금 뭘 목격했는지, 어안이 벙벙했다. 노인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합리화하기엔, 그 말투와 광기가 기괴하기만 했다.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또다시 수다로 나를 붙들었다.
“아무튼 이렇게 잘생긴 총각이 동네에 와버렸네. 어젯밤에도 동네 할매들이 다 새로 온 총각 구경한다고 여기 서 가지고…”
“밤에 다들 여기 계셨다고요?”
“아니… 뭐, 집에 들어간 건 아니고. 워낙 외지인이 안 오는 곳이니까.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떻게 알게 돼서 온 거야? 그 답을 내가 못 들었네?”
“예. 아버지가 살던 곳이에요. 친하게 지내셨나요?”
노인은 당황한 듯 평상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입가에 맴도는 주름이 문득 차분해졌다.
“자네 아버지… 겁나게 좋으신 분이었지. 나는 이제 일이 있어서 가야겠구먼. 젊은 친구 일하는 데 방해해서 미안하네.”
아버지의 이름이 스치자, 그는 급히 예의를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예. 들어가세요.”
어젯밤, 모두가 내 마당에 서 있었다니. 새로 온 나를 보러? 얕은 소름이 돋아났다. 시골이니 그럴 수 있다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시골의 노인들이니 그럴 수 있다고….
그가 떠난 후, 마을의 고요는 마치 무너진 무덤의 적막 같았다. 여름의 바람은 여전히 선선했고, 시골의 공기는 한층 더 맑게 스며들었다. 방금 노인과의 만남은 다른 차원의 시골에서 벌어진 대화 같았다. 맑은 공기와 선선함은 다르게만 느껴졌다. 나는 좋은 점만 기억하려 애썼다.
하나님이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마을이라니. 어쩌면 내가 꼭 있어야 할 곳일지도 모른다. 테이블 위의 노트북과 담배 두 가지 중 하나를 집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손은 자연스레 담배로 향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늘 바빴던 아버지. 중학교, 고등학교도 나를 기숙사로 보내버린 아버지. 군대에 갈 때도 간부로 지원하라며 등을 떠민 아버지. 그때 나는 의심했다. 간부로 가면 서로 떨어져 있을 시간이 더 길어지니까, 아버지는 나를 피하는 게 아닐까.
군에서 돌아왔을 때도 아버지와는 한 달도 채 함께 있지 않았다. 미국 유학을 권하고, 홀로 귀농을 결심하셨다. 아버지의 장례식마저 참석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왔다. 그제야 나의 울분이 터졌다. 미국에 있던 나는 어머니에게 의절을 선언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는 살아있을 때도, 죽어서도 나를 멀리했다. 그 사실이 내게는 상처였다.
나는 한 번도 가족의 일부였던 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앉던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건 어색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것은, 기괴한 꿈같았다.
이곳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봐야 할지 모른다. 모두가 내 앞에 앉아 있던 노인처럼 특이한 사람들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궁금해졌다.
평상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황국의 군사’를 자처하는 노인이 마을의 이미지를 결정짓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밤마다 나를 관찰하게 두는 것보다는, 직접 대면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로 쌓은 담벼락을 따라 걸으며, 흙바닥에 슬리퍼를 끌고 바로 옆집, 푸른 지붕의 넓은 집부터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녹슨 대문은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들려오는 외국어에 나는 문을 여는 것을 망설였다. 러시아어처럼 들렸다. 문틈으로 보이는 두 남자는 바닥에 펼쳐놓은 고추를 말리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만수 할배는 이미 만났지?”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나의 등을 울리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 말씀 나눴습니다.”
“먼저 계시던 분의 아드님이라고? 젊은 사람이 시골에서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들어와. 차 한잔해.”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냥 인사만 드리려고 들른 참이었습니다.”
“시골에선 그러는 거 아니야. 어서 들어와. 차랑… 밥은 먹었고?”
마치 나와 만수 영감님의 대화를 엿들은 듯, 할머니는 이미 나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친절. 마지못해 그녀의 마당으로 발을 옮겼다. 할머니는 마당 한쪽에서 쭈그리고 일하던 건장한 백인 남자 둘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인사혀. 저기 파란 옷 입은 놈이 하비브, 흰옷 입은 놈이 지하드. 내가 주인이야.”
“주인이요?”
입꼬리에 불쾌한 미소만 남은 채, 얼굴이 굳었다. ‘주인’이라니. 하비브와 지하드는 할머니의 소개에도 아랑곳없이 고추를 뒤집으며 일을 이어갔다. 나와 눈을 마주칠 틈조차 없어 보였다. 할머니는 차를 가져오겠다며 미닫이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흙바닥에 선 채, 마당을 내려다보며 두 백인 남자를 바라봤다. 어색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 안녕하세요?”
“나가세요.”
“네?”
“할머니 안 나올 거예요.”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두 남자는 어눌한 한국어로 조용히 속삭였다. 마치 집 안의 할머니가 듣기라도 할까 봐 눈치를 살폈다. 눈은 고추에 고정한 채, 복화술처럼 말했다.
“나가세요.”
나는 슬리퍼가 흙을 끄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푸른 대문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대문을 나서는 순간, 눈에 스친 창고 안에는 무당들이나 쓸 법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좁은 길을 빠르게 걸어 푸른 지붕의 집에서 멀어졌다.
마을 입구 쪽, 오른편의 작은 고추밭에 할머니 두 분이 일에 전념하고 계셨다. 그들은 화가 난 얼굴로 고추를 따고 있었다. 움직이는 입술을 보니, 그들의 대화가 궁금해졌다.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 두 할머니의 입에서는 땡볕만큼 뜨거운 욕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서로를 향한 욕설은 아닌 듯했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지도 않은 채, 혼잣말로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씨벌롬. 내가 분명 더 달라고 했는디.”
“망할 놈의 새끼.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겨.”
화가 난 어르신들에게 인사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등을 돌려 멀어지기엔 누가 봐도 어색한 그림이 될 것 같았다.
용기를 내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들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소녀 같은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황국의 군인을 자처하는 할아버지나, 외국인 노동자를 노예 부리듯 대하는 할머니만이 이 마을의 전부가 아님을 느끼며,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어제 이사 온 총각인가 보네. 잘생긴 얼굴 다 타겠네. 뭐 하러 돌아다녀.”
“어르신들께 인사라도 드릴 겸, 동네 한 바퀴 돌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시골에서 심심해서 살 수 있을런가 모르겠네. 그러면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서 일 봐.”
“예.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할머니들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미소를 띤 채 고개 숙여 인사하고, 뒤를 돌아 한 발자국 내디뎠다. 고추가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그들의 욕설이 들려왔다.
“죽일 놈의 새끼...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에휴, 내가 병신이지. 내가 더 열심히 기도해야지.”
만수 할아버지의 강렬한 첫인상 때문에 편견이 생긴 건 아닌지 욕설을 뒤로하며 생각했다.
‘개인적인 일이 있으신가 보지. 마을에 다른 분들과 다툼이라도 있었던 걸까... 내가 신경 쓸 일 아니지.’
작은 고추밭을 지나, 도로로 이어지는 마을 입구에 섰다. 정말 작은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와 마을 회관, 그리고 몇몇 고추밭. 앞으로 읍내를 드나들며 살아야 하니, 도시에서 살 때보다 훨씬 번거로운 삶이 될 것 같았다. 도로에는 차는커녕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았다.
뜨거운 햇볕에 등을 돌려 왼편을 바라보니, 산 입구 언덕에 두 개의 묘가 보였다. 평범한 무덤과 다름없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관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무 옆 벌초가 된 지 오래인 듯한 두 묘에는, 크기와 재질이 같은 투박한 나무 십자가가 박혀 있었다. 무덤의 흙은 파헤쳐져 있었다. 말뚝처럼 꽂힌 십자가를 보며, 이게 고인을 기리려 꽂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쪽 발을 언덕에 올려놓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형사는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십자가 사이로 퍼진 풀과 녹슨 못을 보니,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것 같았다.
누구의 묘일까? 누가 저 십자가를 꽂았을까? 연기를 내뱉으며 고개를 숙여 삐뚤어진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기침이 터져 나왔다. 삼베로 만든 듯한 개량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어제 이사 온 총각이지? 어두워서 저 묘는 못 봤을 텐데. 자네가 와서, 참 복이야 이것도. 이게 다 운명이야.”
기침을 멈추고 목을 가다듬은 뒤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어제 이사 왔습니다. 안 그래도 마을 어르신들께 인사드리려고 마을 한 바퀴 돌던 참입니다.”
“요새 보기 드문 예의 바른 청년이구먼. 나는 여기 무덤 바로 옆집에서 조그마하게 철학관을 하고 있으니, 사주 보고 싶으면 언제든 놀러 와.”
“예, 사주요… 제가 그런 건 잘 몰라서요.”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시소를 타듯, 내가 놀란 표정일 때는 웃던 그가 이내 무표정으로 읊조렸다.
“운명을 안 믿는다는 거여?”
“아니요. 제가 서울 있을 때 교회를 다녀서요.”
“나도 교회 다녀. 여기 마을 사람들 다 교회 다녀.”
철학관을 운영하며 사주를 봐준다는 노인이 교회에도 다닌다니, 가까워지는 죽음과 지옥이 두려워서일까? 그의 나이는 적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새치 하나 없고 굽지 않은 등에서 강인함이 느껴졌다.
“교회 건물 봤습니다. 저도 일요일에 시간이 되면 들르겠습니다.”
“아니야. 시골 교회가 무슨 볼품이 있다고. 젊은 사람이 시골 교회 와서 배울 거 하나 없어.”
그는 내가 교회에 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듯했다.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작은 마을의 교회는 단순한 믿음의 공간이 아니라, 수십 년을 함께한 공동체를 상징하기도 하니까.
노인의 얼굴에서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들은 폐가나 공터를 찾아 자신들만의 아지트라 여기며 하루를 보내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은 절대 친하지 않은 친구를 그들의 아지트에 초대하지 않는다. 그들의 교회에 간섭할 생각은 없다. 철학관 영감님은 인사도 없이 귀신처럼 멀어지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끝내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어르신!”
“어. 그래. 또 볼일 있는겨?”
“이 무덤 말이에요.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요?”
영감님의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분명 웃고 있지 않았다.
“사연은 무슨 사연. 뭐, 옛날 마을 사람 묘인가 보지. 근데 이제 우리 마을엔 예전처럼 제사 지내는 사람도 없으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의심을 숨길 수 없었다. 셀 수 없는 세월을 이 작은 마을에 살았을 텐데. 무덤을 돌아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어르신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동네에 이름 모를 오래된 묘 하나쯤 있는 게 이상할 건 없다. 누군가 무덤을 욕보이고 싶었든지, 아니면 그럴만한 ‘사고’가 있었든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집을 향해 돌아서자,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졌다. 비가 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버릇이란 건, 그렇게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걸음을 옮기던 나는 다시 무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오래된 묘라면, 적어도 지금보단 풀이 훨씬 무성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나 자신을 다그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슬리퍼 안에 작은 돌멩이가 들어와 멈춰 섰다. 멈춰선 김에라는 변명으로 슬리퍼를 벗어 돌을 털어내며,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다. 무덤까지 시선이 닿지도 못했다. 무덤 옆, 철학관 할아버지가 사는 집 대문 틈 사이로 무언가가 보였다. 그의 눈이었다. 확실히, 눈이 마주쳤다. 외지인을 향한 경계일까? 그렇기엔 바로 전까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던 어르신이었다.
다시 돌아볼까, 말까. 소름이 돋았다. 수십 번을 고민했다. 혹시나 아직도 문틈 사이로 나를 보고 있을까.
유혹을 떨쳐내고 집으로 향했다. 드리운 먹구름 때문인지, 고추밭의 할머니들은 보이지 않았다. 푸른 지붕 아래서 들리던 외국어도 이제는 사라졌다. 키 작은 돌담에 둘러싸인 집 마당에 돌아온 나는 평상 위의 물건들을 하나씩 치웠다. 비를 피하려고.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를 피하고자.
미닫이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천둥이 하늘의 북을 두드렸다. 방 안으로 들어가 솜이불에 몸을 눕히니, 어제처럼 먹구름 같은 졸음이 쏟아졌다. 잠들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라는 판단에, 방문턱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뒤적였다. 잠시 세상이 밝아졌다.
하나님이 마을의 사진을 찍으려는 듯, 밝고 하얀 섬광이 마을 전체를 덮쳤다. 놀라 고개를 드는 순간, 천둥의 굉음이 번개의 뒤를 따랐다. 번개와 천둥은 술래잡기를 이어갔다.
다시 한번 섬광이 이곳을 덮쳤을 때, 카메라의 촬영음을 들었다. 문턱에 앉아 있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근처에 보이는 빗자루를 몽둥이처럼 움켜쥐었다. 그리고서야 한 박자 늦은 천둥소리가 쏟아졌다. 허탈하고 창피했다. 빗자루를 거실로 던지고, 다시 문턱에 앉았다.
'분명히… 촬영음이었는데.'
머쓱함에 혼잣말을 내뱉으며, 다시 거실로 나가 끝나지 않은 짐 정리를 이어갔다. 이내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오는 시골의 풍경도 나름대로 운치 있겠지.’
거실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힘겹게 문을 열었다. 돌담 너머를 주시했다. 내가 천둥이라면, 돌담 너머에 분명 번개가 있었다. 한발 늦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머리카락 같은 검은 무언가. 설명할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돌담 뒤에 앉아, 숨은 채 이쪽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려움에 괜히 혼잣말을 내뱉었다. 누군가를 의식해서 문을 닫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비가 너무 들어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