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이 사는 곳
“비가 너무 들어오네.”
거실 벽에 걸린 달력 위의 십자가를 보고서야, 이성적인 판단을 되찾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의 첫인상이 내게 불필요한 두려움을 심어줬을 뿐이다. 돌담 너머로 머리카락이 흘러 넘어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의 무의식은 내가 공포를 포용하길 원했을지 모른다.
그제야 떠올랐다. 돌담 너머 교회 벽에 그려진 그림. 그 벽화에는 검은색으로 칠한 부분이 있다. 그것이 머리카락이라며 나는 공포를 붙잡으려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을 연 순간에 그 검은 무엇이 사라진 것. 그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방에서 진정제를 한 알 꺼내, 물도 없이 삼켜내었다. 약효가 돌자, 돌담 뒤에 누가 있었든,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거실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다짐했다.
‘새로운 곳이다. 새로운 출발이다. 서울에서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 이 모든 변화는 아무 의미도 없다.’
건강한 정신을 되찾기 위한 여정에 뒷받침될 경제력이 필요했다. 핸드폰을 꺼내 이메일을 확인했다. 새로 도착한 메일 하나. 설렘에 가득 찬 나는 좋은 소식을 머릿속에 그려냈다. ‘맡길 일이 있다.’ 등의 희망스러운 문장이 적혀 있을 거라고 믿으며 메일을 열었다. 하지만 화면에 나타난 첫 문장은 차갑고 무심했다. “아쉽게도…”로 시작하는 글귀는 내가 애써 지켜오던 일자리마저 잃었다는 현실을 고스란히 전했다. 잠시 멍해진 나는 손에서 핸드폰을 놓았다.
마치 마음속 어딘가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경제적인 불안과 함께, 다시금 막막한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시골 마을. 어두운 집의 거실 바닥, 패배자가 누워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기적을 보여주시옵소서. 빛이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 누워있는 저에게 복음을 들려주시옵소서. 미천한 제가 감히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이라는 두 글자를 내뱉는 순간, 폭우가 멈췄다. 그것을 좋은 계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차갑고 어두운 거실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실의 불을 켜기 위해 스위치 쪽으로 다가갔다. 손끝이 스위치에 닿기도 전,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동물의 소리인가? 가래 끓는 인간의 목소리. 인간의 목소리였다. 옆집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화일까? 대화라고 하기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돌담과 미닫이문에 가려 정확히 들리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음성이었다. 방언이다. 교회에서나 들을 수 있는 방언이 분명했다.
나는 조심스레 손에 힘을 주었다. 스위치가 ‘딸칵’ 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어둡던 거실에 불이 켜졌다. 빛이 들어오자, 동시에 바깥의 소음이 멈췄다. 다시 불을 껐다.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방언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불을 켜자 소리는 또 사라졌다. 누가 나한테 장난을 치나? 나한테 겁을 주고 싶나? 모욕 같았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분노는 방향을 잃어갔다. 미닫이문을 거세게 열어 문틈에 털썩 주저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돌담 너머, 교회를 노려보았다. 불이 꺼진 교회. 십자가의 네온조차 붉게 빛나지 않는, 깜깜한 건물. 그 십자가를 향해 연기를 뿜었다. 멀리 나가지 않을 담배꽁초를 교회 방향으로 내던졌다.
다시 문을 세게 닫고 밝은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피해망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결정해야 한다. 내게 강박과 피해망상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서울에서처럼 인간들을 의심하며 살아갈 것인가. 서울의 때를 이 조용한 시골까지 끌고 오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날의 남자가 다시 떠올랐다. 살인자. 내게 웃으며 다가왔던, 그 살인자.
맑은 공기의 한적한 시골 마을. 악인은 오직 나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른 채, 눈을 떴다. 눈곱도 떼지 못한 얼굴과 저리는 손. 커피잔을 들고 문을 열었다. 젖어 있는 신발과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의 폭우와 그 기이한 잡음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아침부터 귀에 남은 소리와 일 생각에 숨이 막혔다. 번역 계약을 하나 더 잃은 뒤로, ‘될 대로 돼라.’라는 체념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는 듯했다.
비가 그친 마당 위로 아침 해가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평상으로 천천히 걸어가, 햇빛에 마른자리를 골라 앉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불씨가 담배 끝을 물들이고, 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지나가는 순간,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밤, 나는 미닫이문 틈에 앉아 마당을 향해 담배꽁초를 던졌었다. 내가 사는 곳이니 내가 치워야지. 그런데 마당에는 담배꽁초는커녕,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빗물이 쓸어간 건지, 바람이 치워준 건지, 신경 쓸 힘이 없었다.
커피를 한 모금 더 삼키고는, 평상에 천천히 몸을 눕혔다. 내가 앉아 있던 부분만 겨우 말라 있었고, 나머지 나무판자는 여전히 축축했다. 등으로 느껴지는 불쾌한 습기를 뒤로하고, 하늘 올려다보았다. 당당히 빛을 뿜고 있는 하늘의 태양. 그 빛이 어젯밤 나의 기도를 떠오르게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핸드폰을 꺼내 천천히 화면을 켰다. 새로 도착한 메일 하나.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담배와 카페인의 각성 때문일까, 태양 아래서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안녕하세요. 번역가님...’으로 시작하는 문장.
일거리였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 게 틀림없다. 나도 모르게 담배를 세게 물었고, 연기가 눈을 향해 피어올랐다. 역시 번역을 의뢰하는 메일이었다. 그러나 정중한 인사말과 함께 첨부된 예문은 어쩐지, 석연치 않았다.
안녕하세요. 번역가님.
웹사이트에 올라온 포트폴리오는 확인했습니다. 섬세한 언어 감각이 인상 깊었습니다. 함께 작업할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저는 작은 교회에서 목사님을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공동체는 새로운 신앙의 장을 여는 과정에 있으며, 말씀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영문 번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번역 방향을 참고하실 수 있는 예문입니다. 성경의 문체를 살리면서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시는 게 가능할까요? 목사님께선 섭섭지 않은 사례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번역가님의 소중한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이삭 드림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은, 주께서 그들을 따로 불러내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세상의 법이 아니라 기적의 법으로 살아야 하리라.’‘모든 기적은 주께서 주신 것이니,
누구든 홀로 가지지 말고, 그의 이름으로 나누고,
형제의 굶주림을 채우며 그 기적을 이루어야 하리라.’
‘네 육신은 주의 기적을 담는 그릇이니, 기꺼이 내어드리고,
형제를 위한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게 하라.’
메일에 적힌 성경을 읽다 보니 표정이 굳어갔다. 미간을 찡그린 채 삭제 메일을 삭제하기로 마음먹었다. 버튼 위에 멈춰 선 엄지손가락이 망설였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나는 다시 메일을 읽었다.
‘목사님께선 섭섭지 않은 사례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정말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아니면, 기도라는 이름의 합리화에 불과할까?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니. 나는 기도했고, 기회는 이토록 이상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혹시 나를 시험하시는 건가? 필터 끝까지 닿아버린 담배 불씨가 손끝을 뜨겁게 태웠다. 화들짝 놀란 나는 바닥에 꽁초를 던지고 데인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또렷해졌다.
메일을 삭제한 뒤,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평상 옆, 푸른 지붕 집 앞에 서 있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는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한 박자 늦게, 무심한 듯 웃음을 지으셨다. 나는 잽싸게 담뱃불을 밟고 할머니께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 거기 서 계셨어요?”
“서울 총각이 많이 바쁜가봐. 멍하니 뭐를 그렇게 보고 있어.”
“아, 아니요. 일 때문에요. 무슨 일이세요?”
“마을회관 형광등 불이 나갔는데 총각이 좀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만수 할배는 허리가 아프고, 철학관 할배는 아침부터 보이지도 않고.”
“예, 도와드릴게요. 근데, 집에 일하시는 분들 계시잖아요?”
할머니의 입가가 단숨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를 지그시 깨물고 말했다.
“그 병신 같은 것들이 손목을 다쳐도 둘 다 동시에 다치질 않나. 쓸모없는 것들.”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불쾌함을 숨길 수 없었다. 정말 이분은 자신이 노예를 거느린 주인이라고 믿는 걸까? 할머니는 내 손목을 잡아끌며 평상에서 일으켰다. 굳고 각질진 손의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어쩌면 그저 아침 공기의 싸늘함 때문일지도.
“뭐해. 빨리 와. 도와준다며.”
“지금요?”
“그럼 언제 도와줄 건데?”
“방금 일어났거든요…”
“등 하나 갈아주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네, 갈게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할머니는 등을 꼿꼿이 펴고 뒷짐을 진 채, 행진하듯 빠르게 걸어갔다. 나에겐 그 등을 따라가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속으로 끓어오르는 짜증을 숨기며,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신발을 벗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잠시 숨을 내쉰 뒤, 표정을 고쳐 쓴 채 뒤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눅눅한 공기와 묘한 냄새, 미지근한 온도가 얼굴을 덮쳤다. 기분 나쁜 축축함이 바닥과 벽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신발장에는 수많은 고무 슬리퍼들이 서로를 밀치듯 비좁게 자리하고 있었고, 안쪽 거실엔 할머니들, 그리고 사라졌다던 철학관 할아버지까지 모두 나란히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아무런 잡담도,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노인들의 시선은 문을 통해 들어온 나에게 고정되었다.
“바꿀 형광등은 있죠? 어디 있어요?”
고추밭에서 욕을 하던 할머니는 어느새 내 옆에 와 형광등을 건넸다. 다른 할머니는 옆방에서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나왔다.
“바퀴 달린 거 말고는 없어요?”
“없어.”
“…그럼 잘 잡아주세요.”
아무도 대답도 없었다. 말도, 움직임도, 농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