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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umi 여이진 유신디 Oct 13. 2023

기 빨리는 퀴어 퍼레이드

기념일/ 유신디

며칠 동안 거센 비바람이 불었지만 오늘 만큼은 아침부터 따가운 햇빛이 아침을 맞이해 주었다. 이날을 위해 장만한 오렌지색 미니 원피스를 꺼내 입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티에 다가갈수록 각각의 무지개로 자신들을 꾸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무지개 망토를 두르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가방을 쓴 이도 있고 또 어떤 무리는 단체로 무지개 티셔츠를 입기도 하였다.


퍼레이드가 12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나도 퍼레이드 시작 30분 전에 친구를 만나 자리를 잡아 보았다. 그런데 앗불싸 팔과 다리에 선크림 바르는 것을 잊고 있었다. 손등을 앞뒤로 뒤집으며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사실 뜨거운 유럽의 태양 앞에서는 별 효과 없다. 12시가 조금 넘자 멀리서 함성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지개 옷을 입은 강아지, 무지개 스티커를 붙여주는 사람들, 묘기를 부리며 걷는 무리들. 형형색색의 무리들이 힘차게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있다면 바로 나였다. 호기롭게 퍼레이드를 보겠다며 나 온긴 하였으나 파워 I인 나는 퍼레이드 시작 30분 만에 기가 빨리기 시작했다. 결국 얼마 못 가 함께 구경온 친구에게 퍼레이드의 종착점인 공원으로 가자고 말을 하였다. 공원으로 가는 길에 스타벅스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한잔 사 들었다. 스티븐 그린 파크에 도착하자 좀 전과는 달리 아주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한동안 여유를 만끽했다. 이렇게 여유로운 스티븐 그린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주말인데 이렇게 사람이 없다고?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자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퀴어 퍼레이드의 종착 공원은 스티븐 그린이 아니라 메리온 스퀘어였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메리온 공원으로 향했다. 겨우 공원 안으로 들어왔지만 이제 더 이상 쓸 에너지가 없다. 그렇다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늘치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것이다. 친구에게 미안하다 말을 하고 공원을 바로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으로 발을 옮겼다. 이렇게 허무하게 퍼레이드 구경은 끝나버렸다. 집으로 와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뒷마당에 앉아 에너지를 충천했다. 햇빛은 유독 따가웠지만 겉옷을 챙길 힘도 없었다. 그렇게 3시간을 뒷마당에서 에너지를 채우다 보니 결국 팔은 따끔거렸고 다음날 시꺼멓게 타고 말았다. 지금도 이날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어이없도록 허무한 하루를 보냈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 봐야겠다. 그래~ 어제 또 더블린에서 하루종일 반팔을 입고 다니겠어, 언제 또 이렇게 여름 같은 더블린을 경험할 수 있겠어. 그냥 다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생각해 보자. 내년에는 안(못)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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