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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마음아 Aug 30. 2024

사랑 표현은 오늘 해도 늦습니다.

나의 삶을 만들어 주신 내 어머니


그룹 지오디(GOD) 의 '어머님께'라는 노래를 다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끓여먹었던 라면

그러다 라면이 너무 지겨워서

맛있는 것 좀 먹자고 대들었었어

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못해 꺼내신

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

자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

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질 않았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야 이 야 이 아 아 아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고 눈물도 흘리고

지오디 '어머니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자신은 항상 괜찮다! 괜찮다! 하시죠. 

자식들 걱정에 밤잠을 설치 가며 온 가족에 대한 사랑과 정성을 쏟아놓고  좋은 시간을 뒤로한 채 이 지상에서 영영 작별을 고합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세상에 영원할 것 같은 큰 존재가 하루아침 이슬처럼 사라진다는 사실을요.


모든 어머니가 새벽이슬을 맞아가며 아침밥을 지으시고 가장 큰 고봉밥을 아버지와 자식에게 양보하시며 자신의 밥그릇엔 누렇게 탄 누룽밥을 잡수시면서도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셨다는 사실에 늘 밥상 한켠엔 뭔지 모를 아련함이 묻어납니다.

세상 욕 한마디 남 헐뜯는 한마디 없으시던 저희 어머니는 손가락 마디마디 뜯어지고 갈라져 새까맣게 흙물이 들어 계셨지요.





머리에 두건을 쓰시고 그 많은 농사일을 가냘픈 몸으로이고 지고 나르셨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한날은  어머니의 약지 손가락에 낀 까만 때가 족족 끼어있는 쇳덩어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반지였습니다. 어디서 주워다 껴도 그보단 나을 것 같은 생각을 했지요.


늘 마음에 밟혔습니다. 어린 시절엔 반지가 저렇게 생긴 게 맞나? 

그런데 어머니 손에 끼어있는 그 반지를 보며 어머니도 여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끔 누구네 집 결혼식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을 때만 동동구리모를 바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일상을 살면서 늘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사시는 한 여인도 누구에겐 사랑받는 여인이자 누구에게는 곱고 이쁘던 자식이었다는 것을요.








나중에 크면 저 손가락에 이쁜 반지 하나 꼭 끼워드려야겠다.

남들은 여행이라도 다니시던데 우리 어머니는 일 년 삼백 예순 날을 늘 두건을 덮어쓴 채 비 오듯 땀을 흘리시며 망태기만 이고 지고 다시시는 모습에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놀러나 한번 다녀오시지, 이 좋은 날 누구 하나 친구도 없으셔서는 매일같이 막네 인 나만 데리고 이산 저산 산나물이나 캐러 다니시거나 허구한 날 고추밭 무밭 생강 밭 잡초제거 아니면 씨 뿌리는 일만 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 뒷모습만 보고 자랐습니다.








어디서 배우지 않았어도 여자의 일생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중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놈의 집구석 잘 있거라~하며 속 시원하게 작별을 고하려던 그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달려 나오신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땐 친구 같고, 중학교 이후론 원수같이 변한 딸인데도 어머니에게 저는 언제나 친구 같은 자식이었기에 작별이 쉽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시며 버스를 기다리는 저에게 밥 굶지 마라 하십니다.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대수롭지 않은 듯 "내가 뭐 죽으러 가나?" "엄마나 잘 챙기고 계셔!"라며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얼마 안 가 어머니는 치매 판정을 받으십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늘 웃고 계시던 어머니가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말이 없었다 뿐이지 늘 아버지와 자식들 밥상을 정갈하게 차려내시던 분이셨기에 잘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누구요?"라는 첫마디에 무심했던 지난날들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첫 월급으로 어머니 반지를 먼저 샀습니다. 월급 68만 원에 반지가 48만 원이었습니다. 반지 목걸이 팔지  세트를 구입해서 시골집으로 내려가 허공을 바라보며 웃던 어머니의 손가락에 노란색 반지를 끼워드립니다.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내가 너무 늦게 와버린 것입니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내일, 나중에 하지라는 말은 없는 말입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이 살아있는 내일입니다.

마음이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표현하고 조금 더 좋은 사람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 표현은 오늘 해도 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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