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언니와 나는 20여 년 이상 차이가 난다. 예닐곱 살 즘 되었을까?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사는 줄만 알았다. 가을 무렵이었을 거다. 내 나이 또래의 어린아이들을 줄줄이 달고 들어선 낯선 여자
그 여자가 바로 나도 몰랐던 언니였다.
희멀건한 피부, 시골에선 볼 수 없었던 굽이 높은 하이힐, 반짝반짝 윤이 나는 핸드백, 세련미 넘치는 그 여자는 안방에다 짐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어서 시골에서는 먹어 보기도 어려운 비싼 아이스크림과 과자들을 한 봇 따리 풀어 재껴 놓았다.
"수민이 많이 컸네?"하지만 그 어조나 목소리 톤은 언제나 무미건조해 보였다. 큰언니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니 주워다 길렀으니 엄연히 자매는 아니다. 가끔 어머니 생신 때나 아버지 생신 때 볼 수 있었고 그렇게 해도 작은 언니에 비해서는 신사적이고 무미건조한 사람이었다.
적당히 거리감 있으면서 적당히 무심한 사람
아버지 돌아가시고 치매로 고생하신 어머니가 10년을 채운 어느 겨울날 돌아가셨다.
그리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배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끊었다.
우리 남매는 욕심 많고, 말 많고, 시끄러운 사람들 중에 한 부류였다.
결핍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나만큼이나...
결정적인 것은 작은 언니의 말실수였다. 늘 그놈의 말로 언젠가 한번 큰 코 닥칠 거라 생각했는데 그 사건이 자매 간의 싸움이 될 줄은 몰랐다. 그간 20여 년을 막내라는 이유로 담고 살았다.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면서 그 여자의 말실수가 사단을 일으켰고 나는 삼일장을 치르고 난 다음 날 전화를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둘째 언니와 맞짱을 뜨게 되었다.
세상 자기 말이 법인 것처럼 굴던 사람.
아버지와 똑 닮아 있던 어리석은 사람...
하지만 아버지와 다른 점은 말실수였다. 할 말과 안 해야 될 말을 구분하지 못했다. 못 배운 사람이었고... 시절을 잘 못 타고난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이었다.
"너 같은 년이 우리 엄마 뱃속에서 나왔다는 게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디 가서 엄마 딸이라고 하지 말고 살아라"며.. 다시는 내게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멀어 저간 사람들이었다.
그런 남매 중 오늘은 큰언니가 연락을 한 것이다.
아무 감정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모르는 번호를 받아버린 내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네, 오랜만이시네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래, 너도 잘 지내고 있니?"
"네..."
그렇게 세마디 외엔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니는 이것저것 물어왔다.
중간에 형부가 돌아가셨고 그 여자도 혼자였다. 그래, 이젠 놓아줘야 할 인연이지... 생각했다.
미움도 그 어떤 마음도 다 부질없는 인생이다. 그는 그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최선이고 나는 나의 앞의 생을 충실히 살아내야 할 사람이다.
생판 모르는 남보다 잠시 부모라는 매개체로 인연이 된 사람들이 아니던가
어느 생보다 연이 두터워 만나진 인연일 테다.
정중하게 인사를 나눴고 서로가 넘어왔을 시간들에 대해 존중해주었다.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달랐지만 그 역시 나름의 고통을 안고 살아왔고 나 역시 그만큼의 처절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하였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만큼의 고통은 고통도 아니었다는 것을...
이 보다 더한 극한의 고통을 이겨낸 사람들도 있으며 그의 겸손한 삶에 비해서 나는 그저 한낱 어린아이의 응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을 쓰면 쓸수록 부끄러웠다.
내 삶에 집중하지 못한 시절을 글로 써 내려가며 내가 나를 똑똑히 바라봐야 하는 것만큼 그 또한 고통을 안겨주는 것도 없었다. 삶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들을 마흔 너머의 시간이 말해주었다.
하루하루 일상을 담는 글을 쓰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더욱 선명해져 오는 것은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