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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마음아 3시간전

이렇게 꿈을 꾸어도 되는 것인가

아무 희망도 없는 삶에 꿈이란 글자가 들어오다.

남편이 일찍 들어왔다. 

"어?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들어오고?"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얼굴을 새파랗게 질려있었고 어두워 보였다. "무슨 일 있어?" 남편이 말했다. "사고 났어" 남편은 레미콘 회사에 취직했고 늘 산업현장을 다니며 중노동을 했다. 그날은 배가 고파서 언덕 위에 있는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초코파이를 사 먹으려고 들어갔다고 했다. 그때 연식이 오래된 레미콘 차에서 브레이크 호스가 터져 차가 뒤로 밀려 내려왔고 갓길에 세워진 차량을 전부 파손시켰다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세상에 이렇게 운 나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렇게 파손된 차량만 일곱 ~여덟 대였다. 외제차량도 있었고 최소 견적이 1대당 6000만원에서 2,3억 가량의 견적이 나왔다.

공공 쓰레기통이 그나마 견적이 작았다. 여섯 통 합쳐 1500만원이었다.


나는 살면서 1억을 모으려고 그 안간힘을 써가며 모은 돈이 결국 하루아침에 이렇게 수십 배로 털려 나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이 겨우 세 살, 네 살 때였다. 


남편은 말을 잃었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왠지 죽을 것만 같았다. 남편의 얼굴은 더욱 새까맣게 변했고 3일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걱정이 됐다. 혹시나 죽을까 봐. 넋 놓고 미친 사람이 될 까봐 안 쓰던 편지를 3장에 걸쳐 썼다.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위로를 했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빚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 한 번도 돈이 부족해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다만 이럴 때는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우린 그렇게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게 됐다. 단란했던 가정도, 따스했던 보금자리도, 일할 수 있는 터젼도 다 잃어버렸다. 


야반도주가 무슨 뜻인지 감이 왔다.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이 옷가지만 걸치고 아이들과 오랜 삶의 터전으로부터 도망치듯 나와야 했다.  희망이 안보였다. 긴급생활지원비 같은 건 그 후에나 나왔고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넋 놓고 있기엔 아이들이 너무 어렸다. 남편 역시 망연자실하게만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200만 원을 빌렸다. 길거리 장사라도 해야 했다. 그 200만원으로 다꼬야끼를 굽는 다마스를 구입했고 길거리 장사가 시작됐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직장을 다니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손을 놓고 있자니 애들 우유값이며 생활비 역시 감당이 안되었다. 그렇게 길생활이 시작됐다. 남 앞에 나서는 걸 극도로 꺼려하던 내가 길에서 사람들 앞에서 시작한 첫 장사였다. 길장사를 시작하기 전 첫 번째 복병은 운전이었다. 자동차 면허증을 2종보통을 따뒀고 스틱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1종보통이 필요했다. 한 달간 맹연습을 해서 1종 보통을 취득했지만 언덕 위에서 줄줄이 내려가는 자동차를 울면서 버텨야 했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사람들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스크레스였는데 자동차도 내 말을 안 듣고 줄줄 미끄러지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뒤로 밀려날 수 없었다. 그때도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먹고살 돈이 없으니 무조건 앞으로만 나아가야 했다. 


길장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길에 붙여 장사를 하면 세금을 꼬박꼬박 내며 장사하는 사업자들에게 욕을 얻어먹어야 했다. 도저히 물러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른 나에게 여기서도 자기 권리를 말하는 사업자들이 야속하고 미웠다. 살아내야 하는 나에게 죽으라고 떠미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장사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했고 또 그들이 동사무소 직원에게 신고를 하면 펼쳐 놓은 자판을 부랴부랴 챙기며 도망쳐야 했다. 더욱이 가관인건 길장사 하는 사람들과의 자리다툼도 만만치 않았다. 자리다툼은 다른 싸움보다 몇 배는 치열했다. 세상 끝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싸움은 그래서 더욱 이해라는 것이 없었다.

그때가 세상이 가장 야속하고 미웠던 때로 기억한다. 내 처지를 알아주는 이들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다. 기여코 버텨야 했다. 

그렇게 나도 한자리를 차지하려 하루 걸어 하루 다툼을 치열하게 했다. 결국 한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각종 진상손님과의 다툼을 벌여야 했다. 이래저래 취객들도 한 번씩 야속하게 말하기도 하고 그 속에서도 사기 치는 놈들도 있었다. 벼룩의 간을 내먹지 하루종일 불과 더위와의 전쟁을 치른 나에게 뜯어갈 돈이 어딨다고 사기를 치고 돈을 뜯어 가는 놈이 있다는 것을 그때의 경험으로 알게 됐다. 과하게 칭찬하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조심하자! 역시 삶에선 국룰이었다.

길장사를 오래 하면 할수록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그 작은 1평도 안 되는 다마스 위에서 6시간 이상을 버텨야 했다. 겨울장사만 겨우 조금 됐고 나머지는 겨우겨우 먹고살 정도였다. 뭔가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절망이 오래되면 무기력해지는 법이다. 희망이 사라질 무렵 벼룩시장을 보다가 '길 위에 꿈'이란 글자가 내 마음에 박혔다. 나도 꿈이란 게 있었을까? 난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온 걸까...알 수 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인가...답을 알 수 없는 현실앞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글자 한글자 뭔가를 찾고 있었다. 나의 책읽기의 시작은 그때 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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