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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나 Jul 13. 2022

아무나 결혼을 시켜줘서 그래

접니다 그 아무나 가 




지방에 있는 시집에서 가끔 택배가 오는데 과일도 오고 반찬도 오고 김치도 오고 얼린 추어탕도 온다. 이제 부모님이 연세가 있으셔서 예전보다는 빈도도 내용물도 훨씬 줄었다. 하지만 오긴 온다. 며칠 전에도 직접 재배해서 보내주신 과일이 왔다. 납작한 과일 박스 두 개를 위아래로 붙이고 커다란 박스에 담아 보내주셨다. 빨리 시원한 데로 들여보내 달라고 하는 듯한 택배박스. 시집에서 온 택배는 왠지 존재감도 좀 남다르다. 박스를 가지고 들어와 에어컨 바람이 제일 잘 오는 명당 중의 명당에 일단 두었다. 바닥에 두면 좀 보는 눈이 있어 곤란하니 서랍장 위에 잘 올려두었다. 일단은 그랬다. 



택배 해체, 분리작업을 해야 되는데 좀 미루다 보니 시간이 하루가 지나버렸다. 안에 있는 과일로 봐서는 대책 없이 두면 안되는데 싶었다. 이제라도 남편한테 저거 좀 열어서 냉장고에 정리해줘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온다. 이미 남편도 어젯밤부터 택배박스의 존재를 알았을 터, 열었다가 어디 상한 애들이라도 튀어나오면 일이 커진다. 이거 이거 다 썩는다_ 에이 참, 너무하네_ 이러면서 말이다. 굉장히 순화해서 적은 거다. 게다가 조상 중에 분명 아랍인 한 명 정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편의 외모_ 특히 거대한 안구_ 를 들이대며 날 질책한다면, 그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잠시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미 받은 지 하루가 지났다. 받고 나서부터 시집에 아무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잘 받았다고 일단 톡을 넣고 박스를 뜯을까? 아님 먼저 뜯고 상태를 보고 나서 톡을 보낼까? 쓸데없진 않지만 쓸모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핸드폰이 울린다. 아뿔싸_ 한 발 늦었다. 시집이었다. 내가 특별히 신경 써서 저장해 둔 어머님 호칭 덕분에 번호가 뜰 때마다 영화 <맨 인 블랙>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전화를 받았다. 아 예 안녕하세요. 일단 밝게 인사한다. 잘 받았냐고 물으신다. 핸드폰을 통해 느껴지는 분위기가 굉장히 차다 차. 네네 잘 받았죠. 감사합니다. 말하는 동시에 바로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들릴지 모르니까 최대한 조용하고 은근하게 샤샤샥. 



최근에 날이 더워서 다른 집에 보낸 건 죄 난리가 났는데 너네 거는 어떠냐고 물으신다. 난감하다. 아직 못 열어봤는데. 네네 저희건 괜찮아요_ 하면서 얼른 마저 뜯는다. 너네 집에 보낸 게 그 집보다 못한 것들인데 괜찮다고? 다시 돌아온 날카로운 질문. 이거 봐. 맨 인 블랙 요원들 못지않다니까. 네네 저희 거는 괜찮던데요...? 하면서 진짜 우리 과일을 살펴보는데 나쁘지 않다. 이 정도면 괜찮지 뭐. 미심쩍어하시더니 결국 한 방 날리신다. 에이 너 뜯지도 않았구나_ 아, 여기서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한담. 여기서 내가 당황하거나 언성을 높이거나 하면 저기 저쪽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올 텐데. 그가 오면 일이 커진다. 그는 정말 팩트만 말하는 사람이기에 대번 이럴 것이다. 



"엄마, 얘 지금 뜯는다 지금!" 



최악이다. 고로 평온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능구렁이처럼 넘어가야 한다. 아니_ 아니에요. 진짜 저희는 괜찮아요. 여기 서울은 비가 와서요. 날이 시원해요 하하_ 이 정도면 되었겠지. 하지만 요원은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여기는 비 한 방울도 안 내렸는데? 하고 마지막 의심을 날리신다. 하하 그런가요_ 여기는 왔는데요_ 이렇게 말하며 과일들을 냉장고에 은근슬쩍 집어넣기 시작했다. 결국 어머님, 어쩌겠는가. 기운 빠진 어머니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다. 정말 애처롭게 들릴 정도였다. 



"과일 좀 깎아줘라_" 



과일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는 내가 식구들 과일 공급책을 제거한 느낌이다. 


 

결혼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한 천 가지 정도의 질문을 해야 한다. 시집 파트에서는 시집의 지역, 종교, 취향, 연령 등을 감안하여 적절한 문항으로 제공돼야 한다. 내게 어울리는 질문 일부를 몇 개 적어보자면   



Q. 시댁에서 택배를 받으면 만사 제쳐두고 즉각 정리할 수 있습니까? 

Q. 정리 후에는 신속하게 전화를 걸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습니까? 

Q. 싱싱하게 잘 보관했다가 퇴근해서 집에 온 남편에게 시집에서 온 물건임을 알리며 내어줄 수 있습니까?

Q.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되새김질하며 흩어져 있는 포장재들과 박스들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까? 



천 가지 중에 몇 개만 읽어도 벌써 속이 더워지는 기분이다. 이러니 이런 질문을 안 하지. 안 해야 결혼을 하지. 아니 그래도 분명 전부 Yes 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비교하지 말자. 후회하지도 말자. 그냥 나대로 살자. 전화를 끊고 예쁜 아이들로 골라 서너 개 깎았다.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내 몫까지. 세상에 이 단거를! 이 맛있는 거를! 어이구 썩었으면 어쩔 뻔했니! 내가 나를 원망할 기세다. 이렇게 예쁘고 맛있는 복숭아가 '시'자로 시작하지 않는 게 다행이지 뭐. 그렇게 정리하고 넘어가자고. 복숭아는 정말 입에서 살살 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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