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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ty Jan 21. 2022

한 낮 버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결국 버스가 나보다 빨랐다. 지금 시간은 오후 1시 20분.  약속시간은 10분 뒤다. 택시를 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못 느꼈다. 이 더운 날, 한낮에 복잡한 도심으로 불러낸 상대도 시간 약속에 민감한 녀석은 아니다. 하지만 가림막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따가운 햇볕을 맞고 있으려니 덥고 짜증이 난다. 서두른다고 모자마저 잊고 나왔는데. 햇살은 뜨겁고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더욱 기분을 불쾌하게 한다. 뭔가 시원한 음료가 필요해 주위를 둘러보니 저기 위에 편의점이 보인다. 자주 돌아다니는데 왜 몰랐지. 버스 정류장 벽의 전광판을 보니 다음 버스는 10여분 정도 걸릴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하는 지루한 목소리의 아르바이트생 인사를 받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나를 반겨주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냉장고에서 얼음통을 하나 집어 들고, 콜라캔을 하나 샀다. 그리고 자동문을 나서서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얼음 음료를 제조했다. 얼음컵의 뭉쳐있던 얼음을 살짝 테이블에 톡톡... 곧이어 콜라를 들이부었다. 햇볕은 따갑고 텁텁한 열기에 질식할 것 같다. 그리고 등은 땀으로 끈적해진 옷이 엉겨 달라붙어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콜라가 얼음과 만나, 부서지는 청량한 내음과 탄산음은 내 몸을 괴롭게 하는 더위를 어딘가로 날려버린다. 하아.... 빨대를 날카롭게 세워 한번에 십자 틈새에 제대로 꽂아 넣었다. 햇볕이 뜨겁게 달군 의자에 엉덩이를 지지며, 입으로 빨아먹는 콜라만큼 맛있는 것은 없다. 찜질방이 별건가. 그리고 저만치에서 내가 기다리는 버스가 교차로에 들어서는 게 보인다.


얼음 콜라를 손에 들고일어나 뒷주머니를 주섬거리며 버스를 탈거라는 몸짓을 보냈다. 버스기사는 내 의도를 읽었는지 내리는 승객도 없지만, 내 앞에 멈춰 '삐이익' 하며 문을 열었다. 손에 든 음료의 민망함을 '수고하십니다'라는 말에 슬쩍 얹었다. 기사 아저씨는 웃으며 '예'라는 말로 얼음 콜라를 묵인해줬다. 부글대는 열기 때문인지 오후 1시 버스는 한산했다. 나는 제일 좋아하는 뒷좌석의 창가로 갔다. 버스는 내가 채 앉기도 전에 무거운 덩치를 흔들며 출발했고, 나는 익숙한 버스 덜컹거림에 비틀거리지 않고 능숙하게 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에어컨을 틀지 않았지만 기분 좋은 속도로 달리는 버스에 엉겨 붙는 바람 때문에 시원했다. 다만 너무 세차게 얼굴을 때려대서 약간 따가웠지만... 나는 반쯤 열린 창을 좀 더 밀어내며 맞바람에 저항하며 풍경을 감상했다.


나는 빠르게 지나며 흔들리는 버스의 덜컹거림이 좋았다. 가끔 가던 어릴 적 시골 외갓집으로 향하는 길은 비포장된 울퉁불퉁한 황톳길이었다. 외갓집은 시골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이어서, 하루에 버스가 단 3대만 다니는 곳이었다. 그래서 기차 시간을 잘못 맞추면 버스를 몇 시간이나 길에서 기다려야 했었다. 버스가 익숙한 아스팔트를 벗어나 울퉁불퉁한 흙길로 들어서면 그때부터 즐거움의 시작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아 이곳저곳 빗물에 패인 곳을 버스가 지날 때면 버스는 심하게 덜컹거렸다. 위로 튕겼다가 아래로 꺼졌다가 흡사 놀이기구를 타는 즐거움을 느꼈었다. 나는 신나서 눈을 반짝이며, 창밖으로 보이는 논밭과 산의 나무를 구경했었고, 옆에서 어린 내가 앞으로 튕겨나가지 않게 붙잡고 있던 엄마는 엉덩이 아프다며 죽는소릴 했었다. 무슨 버스가 이렇게 덜컹거리냐며 한 손으론 나를, 다른 손으론 앞 좌석 손잡이를 붙잡고 불평을 쏟아냈었다. 버스의 덜컹거림이 신났던 난 엄마의 불만은 귓등으로 흘리며, 이 즐거움이 가급적이면 계속되길 바랐었다.


넋을 놓고 바깥 풍경을 구경하던 나는 손등에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얼음 콜라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손등으로 툭 떨어졌다. 컵 속 얼음은 모두 녹아 맹물이 되어버렸지만, 아쉬운 마음에 미적지근한 콜라를 빨대로 끝까지 쭈욱 빨아들였다. '쭈우욱' 소리가 날 때까지.


버스는 약속이 잡힌 장소가 있는 도심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버스를 타거나 내리는 사람은 없다. 나는 지갑이나 소지품을 확인하고 컵을 들고일어났다. 다음 정류장이 내가 내릴 곳이다. 나는 하차 벨을 누르고 벽에 붙어있는 광고지를 의미 없이 훑어보고 있었다. 버스 뒷문에 서서 두툼한 검은 봉에 몸을 기댄 채 빠르게 스쳐 지나는 밖을 구경했다. 여전히 태양빛은 뜨겁고 눈이 부셨다. 하.... 저 뙤약볕에 다시  들어가야 하다니, 자신이 없었다. 버스가 이내 속도를 줄이더니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정차했다. 그리고 '삐이이' 소리를 내며 뒷문이 덜커덩 열렸다. 나는 기사 아저씨한테 습관처럼 중얼거리며 내렸다. '수고하세요!'



© bhaviksuthar91,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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