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도아닌 것이별것이 되던 날
옆집 친구 프란세스가 막내아들 데리고 유치원 가는 나를 보고 멀리서 달려왔다.
“이 음악, 아주 좋아. 이거 한국꺼지?”
엉덩이를 흔들면서 자기 폰을 내 귀에 들이댔다.
가만히 들어보니 Bollywood에서 들었을 법한 인도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BTS 노래를 기대했던지라 대답보다 콧웃음이 먼저 나왔다.
며칠 전 우리 작은 딸이 했던 말도 생각났다.
“엄마, 오늘 수업 마지막이라고 디스코 타임을 가졌어. 선생님도 학생들도 이어폰을 꽂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거야. 근데 '강남스타일'이 나오더라. 친구들이 말춤을 막 추다가 이 일본 가사가 무슨 뜻인지 나 보고 설명해 달래. 웃기지.”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남자 친구가 코를 하도 심하게 골아서 효능이 좋다던 아시안 약을 샀단다.
“이거 한국말 같은데.. 해석 좀 부탁해! ”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중국어였다. 나도 유럽 말이 헷갈리는데 아시안 말도 오죽할까.
처음 이곳에 이사 오고 나서 중국 음식점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순전히 나처럼 생긴 사람이랑 헬로 한번 해 보고 싶어서였다.
중국글자 ‘복’ 자가 빨간색으로 크게 적힌 중국 음식점, 설마 반 설렘 반으로 음식을 주문했는데 백인 주방장이 영국식에 가까운 중국식 볶음 누들을 만들었다.
이 마을에서 내가 유일한 아시안일까?
지난 3월 미국의 애틀랜타 사건 이후 “아시아계 증오를 멈춰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미 전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퍼졌었다. BBC 드리마 '킬링 이브'의 산드라 오가 거리 집회에서 확성기를 들고 소리쳤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들려온다.
"아시아인을 향한 증오 범죄를 멈춰 달라"
"아시아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래, 이왕이면 아시안 대사답게 잘 살아 보자.
우리 집에서 차 타고 25분을 가면 모리슨이라는 큰 마트가 나온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구석 코너에서 라면과 고추장을 발견했다. 마치 첩첩산중에서 삼산을 발견한 것 마냥 격한 감정을 살살 누르면서 몇 자 되지 않는 한글을 읽고 또 읽었다.
“태 양 초 고 추 장”
태양처럼 빛나는 보물을 가슴에 안고 별것도 아닌 것이 별것이 되었던 그날 오후, 끓여 먹을 라면 생각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군침을 삼키고 또 삼켰다.